나목으로 서다 / 김응숙

 

동구 밖 아카시아에 잎이 무성했다. 한 소년이 잎사귀 하나를 땄다. 소년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하나씩 잎을 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소년은 ‘좋아한다.’에서 헤아리기를 멈췄다. 이제 줄기 끝에 잎이 하나 남았다.

나무둥치에 기대선 소년의 채 여물지 않은 어깨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설핏 해가 기울고, 저만치 동네 골목을 돌아가는 소녀의 그림자가 보였다. 집으로 돌아간 소년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 소녀의 마음인지, 자신의 마음인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나무도 도저히 그 답을 모르겠다는 듯이 우수수 잎을 떨어뜨렸다. 마지막 잎이 어디에 남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왠지 소년은 좋아하지 않는 게 자신의 마음이어야 할 거 같았다. 바람이 매서워지고, 뿌연 유리창 밖에서 눈이 흩날렸다. 겨울이 왔다.

사실 소년은 이미 오래전부터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마음에서 눈이 틔고 세상이 보일 때부터 집안은 온통 겨울이었다. 아버지가 친척에게 서준 보증이 잘못되었다. 순박했던 아버지와 소심했던 어머니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레 움츠러들었다. 집안이 꽁꽁 얼어붙었다. 부모라는 나무에 달린 다섯 개의 눈은 그 혹독한 냉기에 싹을 틔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형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이 공장엘 갔다. 일 년 남은 고등학교 학업을 마치려고 소년은 눈길을 걸어 등교했다.

소년은 소녀의 집을 피해 멀리 둘러 다녔다. 흰 눈밭에 빙빙 발자국을 남기며 소년은 역시 좋아하지 않는 건 자신의 마음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 발자국마저 더 이상 남길 수 없었다. 살던 집이 빚쟁이에게 넘어갔다. 어느 날 밤, 소년은 남루한 살림살이가 실린 리어카를 밀었다. 옆에서는 어머니가 흐느끼며 따라가고 있었다. 소녀가 걸었던 골목에 초라한 리어카 바퀴 자국이 남았다. 그날 소년의 마음에 폭설이 내렸다.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가족의 생활이 어깨에 얹혔다. 얹힌 눈의 무게로 나뭇가지가 찢어지듯 남자는 자주 어깻죽지가 아팠다. 남자는 숨죽이며 살았다. 가끔 술을 마셨지만, 그 화끈한 취기도 남자에게서 겨울을 밀어내지 못했다. 겨울은 오랜 점령군처럼 남자 곁에 머물렀다.

겨울은 벌거벗은 자들에게 가혹한 계절이다. 그들은 숨을 죽인다. 그래야 온기가 달아나지 않는다. 온기를 오롯이 몸속 깊이 간직한 눈에 모은다. 손발은 시려도 심장이 얼어붙지 않는 이유다. 긴 겨울 동안 간간이 꿈속에서처럼 남자는 눈을 틔우고 잎을 내고, 그 잎을 땄다. 잎 하나마다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다.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다….’를 되뇌었다. 그 꿈에서조차 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잎을 다 떨어뜨리고 나목이 되었다. 나뭇가지마다 눈이 쌓였다. 다시 숨이 잦아들었다.

기대와 체념 사이에서 세상이 일렁였다. 겨울 세상에서 하늘은 흔히 잿빛이었다.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듯 모호한 궤적을 그리며 눈이 내렸다. 갈 곳을 잃은 눈이 옷을 벗은 가로수 가지 위에 쌓였다. 인도와 건물 차양과 자동차 지붕에도 덮였다. 눈이 오는 날은 모든 의문과 답이 사라진다. 잠깐 인생의 수를 헤아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법의 시간이 찾아온다.

빨간 옷을 입은 산타가 종을 흔들고, 구세군 냄비가 저만큼 보였다. 신발이 얇은 탓에 나는 발을 종종거리며 남자를 기다렸다. 행인들이 쉴 새 없이 내 앞을 지나가고, 멈췄던 함박눈이 다시 내렸다. 나는 종소리를 헤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웅얼거렸다. 짧은 점퍼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을 때 나는 나의 겨울을 몰고 그의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등 너머로 남편의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아이디가 ‘namok’인 것을 알았다. 가만히 속으로 읽어 보았다. 그의 언 발이, 시린 등이, 무거운 어깨가 눈밭에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이제 머리에 소복이 눈을 인 남편은 더 이상 자신을 헤아리지 않는다. 결핍과 상처의 지문이 묻었던 잎들은 소진되었다. 겨울을 견뎌낸 눈은 그저 푸른 나비같이 팔랑거리는 잎을 피웠다가, 찬 바람이 불면 그저 깡그리 떨어지곤 했다.

어디선가 이른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남편을 재촉해 그곳을 찾아간다.

아마 문경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정신없이 걸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니 남편이 고봉밥 같은 눈을 이고 있는 소나무 앞에 서 있었다. 비로소 언 땅에 뿌리를 내린 뜨거운 나목 같아서 나는 잠시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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