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계절 / 박영자

 

 

초록을 넉넉히 풀어 붓질하던 5월은 싱그러운 소년의 모습으로 찬란하고 향기로워 사랑스런 달이었다.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던 5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이별의 말 한 마디 해볼 새도 없이 졸지에 남편을 놓치고 말았다. 그 날부터 세상은 온통 우울한 회색빛으로만 보였다.

그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려고 허우적대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는 나에게 5월은 또다시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잔혹하게 굴었다. 내 피붙이 중에도 가장 살가웠던 그 애, 사랑하는 내 여동생이 떠난 지 이제 두 달이다. 지상에서 영원한 이별만큼 슬픈 것이 또 있을까. 아직 내 가슴에는 비가 내린다. 피울음 같은 비가 내린다.

암 투병 8년, 참말 질기도록 모질게 버틴 세월이었다. 암 3기라는 그 말을 못해서 우리는 2기라고 그 애를 속였다. 반복되는 항암치료에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우수수 무너져 내렸고, 발톱이 다 녹아나서 쌀알만큼만 남았어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칠까 두려워 한 번도 죽음을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고 살았다. 아니, 죽지는 않을 거라고 굳게 믿다가도 어느 날은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청주에서 수원까지 입퇴원을 거듭하며 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만 고마웠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도는 깊어졌고 “너는 꼭 나을 거야.”라는 희망의 말 외에 아무것도 도울 길이 없었다.

우리의 기도가 물거품이 되던 그 밤, 살고 싶어 감지 못하던 그 애처로운 눈빛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외면하고 피울움을 울어야 했다. 그 기억은 더 새록새록 살아나 생살을 도려내듯 쓰리고 아프다. 예순 다섯의 나이가 아깝고, 그 애와 쌓아온 살뜰한 정이 불쑥불쑥 머리를 들고 올라오는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그 애는 좋은 데 갔어. 하느님 곁으로 갔어. 이제는 아프지 않고 살 거야.’를 주문처럼 외워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이 집착이 언제 쯤 나를 놓아 줄 것인가 막막하다.

서울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이 왔다. 몇 번을 망설이다 통화가 되었다. “네, 전화 바꿔드릴게요.”라는 말 뒤에 귀에 익은 친구의 목소리는 상 노인네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다. 두 마디가 채 이어지지도 않아서 간병인이 낚아채듯 바꾸어서 하는 말의 요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뇌출혈 후 채매가 왔고 설상가상으로 넘어져 고관절을 수술하고 입원실에 있는데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이다.

몇 달 전에 남편을 잃고 방황하는 친구에게 먼저 겪은 사람의 도리로 ‘시간이 약’이라고 위로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금세 무너져 내릴 수가 있는가. 친구와의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임은 이해가 가지만 왜 엉뚱하게도 지극히 사무적인 간병인의 처사가 야속하고 섭섭하기만 할까. 이 상황을 어찌해야 옳을지 한숨만 나온다. 또 하나 친구를 잃을 것 같은 상실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남편은 고향 친구와 이메일로 좋은 정보를 열심히 주고받았다. 남편이 가고 난 후에 그 메일이 내게로 들어왔다. 가끔 안부를 묻기도 하며 나를 걱정해주니 고마웠다. 어느 날부터인지 메일이 뚝 끊어졌다. 메일만 받고 답이 없는 내가 섭섭했겠다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 그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저 한글을 다 잊어버렸어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네요.”

한글을 잊어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진다. 그는 시인(詩人)이기도 했다. 그 분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이런 황당한 일도 있는가. 나는 당황하여 “병원에 가보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나씩 잃어가는 이 상실의 계절이 야금야금 다가온다는 게 두렵다.

차를 몰고 볼일을 보러가는 길, 저만치 한 노파가 허리를 45도쯤 꺾은 채 걸어가고 있다. 상체가 앞으로 쏠리니 곧 넘어질 듯 위태롭다. 내 차가 그를 지나칠 무렵 그는 무의식적인 듯 뒤를 돌아본다. “아, 이 선생님!” 내 입에서 신음처럼 내뱉은 소리다. 차를 세우려고 멈칫거리다 생각하니 바로 그의 집 근처다. 나는 가슴이 메었지만 모르는 체 차를 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교 동료이자 선배인데다 모임도 같이 하는 절친한 사이다.

한 보름 전 쯤 그 남편의 부음을 받고 누구보다 먼저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담담할 정도로 멀쩡했었다. 투병기간이 몇 달 되었으니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가 보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 동안에 금세 저렇듯 무너진 모습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제 하나씩 둘씩 잃어가는 상실의 계절에 서성이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빈손이었다. 부모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친구와 이웃, 직장 동료를 만나면서 인연을 맺어 왔다. 하나라도 더 주워 모으려고, 하나라도 더 알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 두 손 가득 움켜쥐었던 금쪽같은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세상 모서리로 한 발짝씩 물러나 뒷걸음질 치는 듯한 소외감을 지울 수가 없다. 아프다는 소식, 누구누구가 죽었다는 우울한 소식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지만 물이 아래로 흐르듯 탄생과 성장과 소멸이라는 순리를 어쩔 도리가 없다.

‘인생의 질곡이 불행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라도 붙잡고 살다보면 희망의 빛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오려나.

7월의 이 왕성한 푸르름도, 얼마가지 않아 잎을 거두고 갈색으로 변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다. 해바라기가 태양처럼 저리도 열정을 불사르지만 저 꽃이 져야 씨앗을 맺는다. 어쩌면 상실은 완성을 위한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하나씩 둘씩 잃어가다가 모두 잃어버리는 날 내 인생도 완성되려나. 7월도 또 강물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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