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아파트 단지 내 가로수가 잘린다. 기계톱 소리 밑으로 떨어진 가지들이 땅에 닿아 한 번 껑충하고 부르르 떨고 눕는다. 채 푸르지 못한 잎이 달린 가지도 있다. 30여 년 전 입주 초기 묘목 크기가 그 가지들만 했었다. 그들이 어느새 6층 창을 어른거리자 전선을 위협한다는 핑계로 잘리기 시작했다.
효율성이라는 저울에 달아 기우는 쪽을 쳐내고 솎고 제치지만 더러는 자진해 어미 둥지를 자르고 떠나는 가지들도 있었다. "평수 늘려 간대요." 떠나는 이유가 훈훈하면 남는 이들이 얼추 자식 성가成家시키는 마음이었다.
입주하던 여름까지 옆 단지는 휑한 공터였다. 비가 그치면 막내에 또래들을 몰로 맹꽁이 소리를 들으러 갔다. 철거민들이 버리고 간 살림붙이 속에서 먹돌 풀매를 주운 것도 그때다. 어른 한손에 들락말락 한 크기, 내 조모는 한 여름 불린 쌀을 갈아 풀을 쑤어 삼베홑청과 모시옷에 먹였다. 터울 뺏겨 빌빌거리는 아우를 위해 가끔 잣도 갈았다.
일제 말엽, 조모는 전염병에 걸린 이웃이 병막으로 실려 가는 걸 문틈으로 이별하며, 광견병이 돌아 찍혀가는 당신의 삽살이의 눈을 보며 "어찌, 나 살자고 남을 죽이나" 하늘에 대들 맘이었을 것이다. "금은보화 속에 뒹군데도" 순리를 거스르는 건 물분 곡직 죄, 타고난 팔자가 곧 '하늘'이었던 분, 조상 위패 앞은 물론 큰 나무나 바위 앞, 밥을 퍼 담으면서도 비손하듯 기원을 우물거렸으니 풀매를 돌리며 예외였으랴, 가슴이 찡했다. 철거민 고부를 그려놓고 노파를 조모로 바꿨다. 어머님, 이거 버리고 가요. 새댁이 풀매를 가리켰다. 노파는 묵묵부담, 기원을 잃어버린 내 조모가 거기 있었다.
풀매를 밀어낸 자리에 믹서가 들어와 기승했다. 나도 믹서를 들이는 발로 소량의 편 가루도 빻고 쑥과 쌀을 반죽해 개떡도 쪘다. 손쉽긴 했지만 한나절 절구질로 되다진 찰기엔 어림없었다. 죽을 쑤어 파는 집이 생기고 가공된 주스들에 일시 무춤했던 믹서처럼 뒷전에 밀렸던 노파들은 이제 손자녀 돌봄이로 불리기 전, 영어 노래와 동요 구연을 수습하기 전, 건강 검진이 필수라고 했다.
인사동에서 갈아 파는 먹물을 보았다.
조부와 둘째외숙은 참 오래 먹을 갈았다. 조부는 붓글씨만 썼지만 외숙은 매화도 쳤다. 외숙은 또 시조창까지 오묘해서 경사 난 집에 불리면 아낙들 일손이 겉놀았다고 했다. 딱 한 번 본 미소년, 외숙모가 딸 낳고 단산하고도 한참 늦게 외숙에게 딸뻘쯤의 처녀가 홀연 들려 막무가내 낳고 사라진 아이라 했다. 외숙을 빼박은 소년이 망신스런 눈 흘기던 딸들이 문득, '정수리에 부은 물 뒤꿈치에 고인다'며 침이 마르기 시작했다. 미소년이 성가해 외숙 내외분의 봉제사에 지극했던 것이다.
갈아 파는 먹물 인근, 기웃한 서실의 묵향은 옛것인데 양장 일색 중년 아낙 대여섯이 표정만은 진지했다. 시간과 노고를 건너뛴 먹물에 혼이 들었을까.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웃는 격, 나는 필기구와 원고지를 밀어내고 컴퓨터의 신력에 쾌재한 지 오래였다. 천성이 덜렁이지만 원고정리에서만은 까칠해 마지막 원고의 틀린 글자를 따라다니며 손톱만하게 오린 네모를 풀질해 때웠다. 그도 한 장에서 서넛을 넘으면 아예 다시 쓰는 소가지, 내 글에 대한 예우였다. 체력에 무리가 올 즈음 만난 컴퓨터는 구원이었다. 아직도 마음보다 앞서 나간 손가락이 엉뚱 놀긴 하지만도,
연이 닿았을까. 어느 순간 "글을 혼으로 쓴다" "가슴으로 쓴다"는, 너무 귀익어 제쳤던 말들이 새삼 번개로 쳤다. 작은 네모를 오려들고 마지막 원고를 톺을 때 느닷없이 들이치던 번개, 그답 원고를 구겼다. 다시 초고 재고 마지막 정서에 땜질하기, 한두 번에 그쳤던가. 함에도 매번 신의 죽비려니 감사하며 수굿했었다. 애틋하지만 다시 필기구를 당길 맘은 없다. 그리 자주 접했던 모습도 아닌데 벼루 위를 느릿느릿 타원으로 돌던 두 어른의 손길이 선연할 때가 있다. 컴퓨터를 켜는 대신 "예! 뜸 들일게요" 나온 속말 한마디는 기원이요 약속이요 각오였다. 글의 소재와 주제를 묵히고 뒤채며 뜸 들인 시간이 오랠수록 되레 시작 키를 누르기는 어려웠지만 그건 길조였다.
스페인 순롓길, 이제 막 포도나무 순이 돋는 밭둑 군데군데 가지 태운 재가 유백으로 날렸다. 재를 보고 맑은 해 아래를 혼자 걷노라면 "잘못했어요." 마음에서 나오던 소리, 어떤 날은 해 질 녘까지 따라붙어 숙소에 드는 발로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쳐내고 쳐내도 이어 뻗는 내 불용不容의 가지들.
숙소에 흐린 야등 하나 남을 즈음 페치카 앞으로 가면 포도나무 옹두리가 사위고 있었다. 수령 900의 밤나무가 아이들 서넛이 들고도 남아돌게 속이 파먹힌 채 툭툭 알밤을 떨구는 것도 보았다. 가죽만 남은 몸을 버텨 가지를 뻗고 혼신으로 수액을 빨아올려 포도알과 밤을 익히다가 마침내 몸을 살라 나그네를 데우는 옹두리, 양말을 말리던 중년의 순례자는 필경 아버지를 부르리라. 아버지의 사랑 표현을 귀찮아했던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도 있다. 시공을 넘어 뭉근히 조응照應되는 자리, 재 앞.
나도 불용의 가지 하나 쳐 불에 던진다.
기계톱 소리가 그치고 풀 죽은 가지들이 묶여 트럭에 실린다.
재, 하마 가벼이 발음할까 옷깃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