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보가 지붕으로 올라가서 박을 톡톡 튕겨 본 즉, 팔구월 찬 이슬에 박이 꽉꽉 여물었구나. 박을 따다 놓고 흥보 내외 자식들 데리고 톱을 걸고 박을 타는듸. 시르렁 실근, 톱질이로구나, 에이 여루 당그어 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을 밥이 포한이로구나." 흥부가 중에서 박 타는 대목이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의 지붕에는 해마다 박 덩굴이 무성했다. 어둠이 찾아오고 고요한 달빛이 내리는 날, 희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박꽃은 내 어린 눈에도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찬바람에 이파리가 시름시름 기운을 잃어갈 때쯤이면 똬리를 베개 삼아 편안하게 배를 내민 박 덩이가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썩은 이엉이 주저 않을까 무서운 초가지붕을 오르는 데는 막내인 내가 제격이라. 박을 따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름이 넘는 박을 안고 엉금엉금 지붕을 기어다니고는 했었다.
둥글고 종자가 많은 박은 생명력과 다산의 상징이고, 예로부터 우리와는 아주 친근한 식물이다. 《흥부전》에서는 보은의 박이요, <농가월령가>에서는 먹을거리로서의 박이다. 또, 박으로 만들었다는 원효의 '무애호'는 중생을 현실의 번뇌로부터 구원하는 자비의 목탁이기도 했다. 무속에서는 바가지를 두드릴 때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고, 민간에서는 태독이나 치질을 치료하는 약재로도 사용되었다. 어린 열매나 잎으로 나물을 만들어 먹기도 하거니와 잔치 음식에서 약방의 감초격으로 많이 쓰이는 재료이기도 하다.
잘 여문 박으로 만든 바가지는 여러 가지 쓰임새가 많다. 물을 푸는데도, 멍석에 널려진 낙곡을 긁어모으는데도 바가지를 사용한다. 작은 물건을 담아 나르거나, 한 바가지 두 바가지, 부피를 계산하는 단위로 쓰이기도 한다. 요란스럽게 잘 깨어지는 탓에 며느리의 화풀이 대상이고, 때에 따라서는 아이들 체벌에 유용한 교육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물건의 가격을 제값보다 더 주었으면 바가지를 쓰는 격이고, 일을 틀어지게 하면 쪽박을 깨는 격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는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도 있다.
박 바가지를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속이 꽉 차고 외관이 예쁘게 잘 익은 것으로 고른다. 박 하나를 반으로 쪼개는데 무슨 톱질씩이나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껍질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다. 흥부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절반으로 탁 갈라놓으면 솜처럼 부드러운 속살에 촘촘히 씨가 박혀있다. 씨는 따로 모으고, 속은 껍질의 힘살이 드러날 때까지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내야 한다. 그리고 바깥 껍질까지 잘 손질한 다음 푹 삶아서 말리면, 말 그대로 박 바가지가 완성된다.
바가지는 소용에 따라 송곳으로 이곳저곳에 구멍을 뚫는데 여기서 각각의 한살이가 결정된다. 구멍이 아예 없거나 작고 아담스러운 조롱박 바가지이면, 물독이나 술독에서 평생을 보낸다. 꼭지에 구멍을 뚫어 노끈을 매달면 창고에서 농기구가 되고, 더러는 부엌데기 신세가 되기도 한다. 어디에 사용할지는 순전히 만든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 쓰임새가 정해지는 순간부터 바가지로서의 숙명이 시작된다. 자의가 아닌 우연의 결과로 쌀독으로 간 쌀 바가지와 뒷간으로 간 똥바가지도 다를 바 없다.
쌀바가지는 뒤주에서 곱게 지낸다. 쌀가루로 하얗게 분단장을 하고, 귀하디귀한 쌀을 한 됫박씩 덜어내 줄 때마다 온갖 귀염을 받는다. 좋은 곳에 던져진 탓으로, 뒤주가 제 것 인양 거들먹대는 것이다. 반면에 똥바가지는 신세가 참으로 가련하다. 송곳으로 곳곳에 구멍이 뚫릴 때부터 고통의 바다다. 긴 자루에 매달려, 상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깊은 곳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오물을 퍼내야 한다. 배가 볼록한 똥장군의 아가리 속으로 몇 번이고 코를 박아야 하고, 온종일을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토해내는 오물을 받아내야 한다. 덕지덕지 묻은 오물을 씻겨줄 리도 없거니와, 고단한 몸을 눕힐 자리 또한 뒷간 구석이다. 더구나 마주치는 사람마다 코를 싸매고 도망치기 바쁘니 그 비통한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하기야 쌀 바가지라고 다 편한 것만은 아니다. 부잣집에서야 넘쳐나는 쌀을 베개 삼아 뒹굴다가 그저 수북하게 퍼주면 그만이겠지만, 찌든 살림살이에서는 끼니마다 쌀독 밑바닥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박박 긁어주고도 면박만 받는다. 부럽게만 보이는 쌀바가지도 제 가는 길 따라 각기 신세가 다르듯, 똥바가지라고 절망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구린내를 맡으며 한 됫박씩 오물을 퍼준 덕택으로, 제 새끼인 박 덩굴이 구덩이에서 쑥쑥 자라나는 보람을 똥바가지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자식이 커가는 기쁨을, 뒤주 속에 들어앉은 쌀바가지가 어떻게 알리요.
한 배에서 태어나고 같이 자란 쌍둥이도 저리 다른 길을 걸어간다. 스스로 잘나서 쌀독으로 가고, 모자라서 똥통으로 간 것은 아니다. 그저 제게 주어진 길을 따라 묵묵히 긍정해 가고 있을 뿐이다. 바가지면 그냥 바가지이지 쌀 바가지 면 어떻고 똥바가지이면 어떤가. 불가에서는 '오늘의 나는 과거의 인연에 의해 쌓인 우연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만물의 형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 각각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둘은 쓰임새가 다를지언정 '바가지'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전혀 다르게만 보이는 두 개가 하나에서 나왔듯, 본래 똥바가지, 쌀바가지가 따로 정해져 있었겠는가.
더러는 구린내도 맡아가면서 사는 것이야, 우리네 인생사라고 별스레 다를 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