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위와 엄나무순, 오가피와 쑥, 살짝 데쳐 된장에 무치거나 초장에 찍어 먹거나 된장국으로 찾아온 것들, 봄 내음 가득한 식탁이다. 겨우내 떨어진 입맛을 살리기엔 제격이다. 봄나물을 좋아하는 것은, 산촌의 소박한 밥상에 대한 정겨움이 그리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위 한 쌈을 입에 넣는 순간, 잊었던 아득한 기억과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입맛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봄이 기울 무렵이면, 잠시 쓴맛에 밀려나 있던 다른 맛을 찾게 된다. 사과 레몬 오렌지처럼 새콤한, 바나나 딸기 멜론처럼 달콤한 것들을, 요즘 과일은 제철이 없다. 기다림의 설렘은 줄었지만, 언제든 먹을 수 있다. 흔하다 보니 칼로 깎고 자르거나 일일이 손을 대고 먹는 일조차 귀찮아질 때도 있다. 입은 궁한테 손이 게으를 때, 손쉬운 방법은 몇 가지 과일을 섞어 주스를 만드는 일이다. 하나의 과일은 딱 그 맛만 주지만, 여러 종류가 섞인 맛은 딱히 어느 맛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마치 개성을 잃어버린 군중처럼, 뭉뚱그려진 집단의 맛이다.
집단성의 위력은 오래지 않아 개성을 찾게 한다. 입과 코가 서로 가까이 있듯, 맛과 냄새가 합쳐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행복과 만족감을 더해 주기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닐까. 사과 향에 이끌려 한입 깨물면, 새콤한 신선미를 느끼고 과육을 삼키는 순간, 맛과 향이 어울려 비로소 사과의 참맛을 알게 된다. 첫인상에 이끌려 시작한 관계가 서로의 개성을 알게 되며 느끼는 신선함과, 서로 다른 맛을 인정하며 친숙해지듯.
과일의 시작은 꽃이다. 꽃이 불러들인 벌과 나비뿐 아니라 바람을 따라 꽃가루가 전해져서 그것이 열매를 맺어, 햇빛을 받아 쑥쑥 당도를 높인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와 다름없어 꽃의 암술과 수술이 만나면 과일이 생기는데, 그것을 사랑의 결실이자 향기로운 성교의 선물이라고 한 이도 있다. 에로틱한 탐구다. 과일을 맛보는 것은, 그 새콤달콤한 과정까지 음미하는 것이니 결국 짜릿한 사랑의 역사를 맛보는 것이리라.
인간의 성숙과 과일의 숙성과정은 같다. 떫고 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단맛을 낸다. 풋것들은 자동으로 찡그린 표정을 짓게 만든다. 그 맛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식물의 호신책이기도 하지만, 몸에 독소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인간의 경보 시스템이기도 하다. 사람도 숙성의 과정을 거친다. 풋풋한 어린 시절과 신맛과 쓴맛의 시련기를 넘어설 때 차츰 어른스러워진다. 단맛과 쓴맛 그리고 신맛이 어울리면 향과 맛을 증폭시킨다. 감칠맛이다. 감칠맛에 이르기 위해서는 쓴맛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모양, 색깔, 질감이 서로 다른 과일. 마냥 둥글다고 생각하지만, 과일만큼 개성적인 것도 없다. 동그랗거나 길쭉하거나, 빨갛거나 노랗거나, 딱딱하거나 말랑하다. 과일을 고를 땐 만져보고, 냄새 맡고, 퉁퉁 두드려본다. 알맞게 익은 색깔인지 몇 번씩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신중해진다. 잘 골랐으면 다행이지만, 막상 먹어보면 제맛이 나지 않아 실망하기도 한다.
우리 입맛의 변덕은 또 어떤가.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다가도 딱딱한 것을 찾는가 하면, 맛에 끌려 너무 많이 먹으면 질리기도 해 새로운 것을 찾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랑해 쉽게 보이는 사람, 딱딱하게 경직된 사람, 만날수록 즐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질리는 사람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 겉보기엔 말랑해 보이는데 강직하거나, 딱딱해 보이는데 실상은 부드러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이치도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과일은 한 꺼풀 벗겨야 제맛을 알 수 있듯, 사람도 편견이나 선입견의 꺼풀을 벗겨내야 그 사람의 맛을 알 수 있다.
과일은 그 성분만큼이나 중요한 감성을 담는다. 그것에서 읽히는 붉은 심장, 알알이 박힌 검은 눈동자, 햇살 담은 다양한 색깔의 달콤한 육즙, 뽀얀 피부는 유혹적이다. 선악과가 이러했을까. 아담과 이브는 '먹음직도 보암직도'한 그것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영원한 천국 대신 덧없는 과일 맛'을 선택했으리라. 세상은 선악과처럼 먹지 말아야 할 금기된 과일이 있을 것이지만, 그럴수록 꼭 해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따르는 법. 죄가 되고 벌이 돌아오는 줄 알면서도 저지른 그들의 모험심으로, 어쩌면 인간 사회가 지금껏 발전해 왔는지도 모른다.
귤이 지금처럼 흔한 과일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 하루는 은행원이었던 둘째 삼촌이 할머니께 드리려고 귤을 사 왔다. 책에서나 보았지 실물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노란 빛깔에서 풍겨나는 향은 군침을 돌게 했지만, 맛을 본 할머니는 그것을 장롱에 넣어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먹고 싶은 마음에 며칠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것들은 며칠 후 썩고 물러 터져서야 장롱 밖으로 나왔다. 귤 맛을 보지도 못한 나는 실망을 한숨으로 푹푹 내쉬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귀한 것일수록 내놓고 시선을 두루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안으로 끼고돌면, 온실 속 화초가 되거나 그 옛날 장롱에서 곯아버린 귤이 되니 말이다.
삶은 온갖 맛을 가지고 있다. 싱겁거나 짜거나 달거나 쓴맛, 어느 날은 순한 맛이더니 어느 날은 짠맛이 되고 매운맛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늘 같은 맛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덜 익어 시큼털털한 사람, 과육보다 씨만 잔뜩 들어있는 사람, 외형과 색깔은 그럴듯한데 내용이 없는 사람은 언젠가는 기피하게 마련이다. 숙성된 과일처럼 잘 익은 사람은 언제나 가까이하고 싶다. 매력 있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특정한 한 가지의 맛이 아니라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선 먹을 것이 많은 과육처럼 취할게 많다. 그러나 어차피 처음부터 익을 수는 없다. 매번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후숙 과일처럼.
살구, 복숭아, 키위, 파인애플, 멜론 같은 것들이 그렇다. 바나나는 마냥 노란 것이 맛있는 것은 아니다. 주근깨가 약간 돋을 때까지 뒷맛을 챙겨야만 한다. 그것은 기다린 맛이다. 젊은 것이 보기에는 좋지만, 깊숙한 맛을 들인 내면의 아름다움은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맛이 들 때까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덜떨어진 듯한 사람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되는 경우를 흔히 보지 않는가. 겉모습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때로는 독립된 맛보다 여러 과일이 섞인 집단적 맛이 필요할 때도 있다. 융합과 통합의 맛도 과일이라는 속성 때문에 가능하다.
과일은 인간 삶의 조건과도 닮아있다. 새콤하거나 달콤하거나 떫거나 씁쓸하다. 회피할 수 없는 일상의 과정 속에서 겪는 맛의 관계망이다. 삶은 하나의 빛깔, 하나의 모습, 하나의 맛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