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서 숨소리 목소리는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소리다. 그런데 거기에 발걸음 소리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손뼉처럼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발걸음 소리는 숨소리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이라면 내지 않을 수 없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내겐 발걸음 소리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러니까 중학교 다닐 때였다. 시골 이모님 댁엘 갔었는데 여름 해가 지자 순식간에 어두움이 짙게 몰려왔다. 그런데 저녁 준비를 하시던 이모님이 "네 이모부 오신다!" 하시는 것이었다.
"어디예요?" 내가 묻자 "음, 저기 느티나무께 오는 것 같다." 하신다. 느티나무께는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고 칠흑 같은 시골 마을의 어두운 밤이 아닌가.
하지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닐텐데 이모부가 거기만큼 오고 계신단다. 한데 조금 후에 이모부가 정말 들어오셨다. 하도 신기하여 쳐다보았더니 빙긋이 웃기만 하신다. 그렇지만 내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러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두게 되자 비로소 이모가 이해되었다. 내게도 늦게 돌아오는 아이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도 전에 아이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오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집까지는 남의 집을 셋이나 거쳐야 되는 데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건만 아이가 집으로 오는 것으로 분명히 감지가 되었다.
특별히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엇, 어떤 통함과 나만의 느낌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연의 줄을 타고 전율처럼 와닿는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것은 마을 건너 냇가 빨래터에서도 재워놓고 나온 아기가 깨서 우는 것을 느끼던 우리 어머니나 아무리 봐도 구별이 안 되는 쌍둥이 아이를 아이 엄마가 아주 자연스럽게 알아보는 것과도 같다고나 할까.
오늘도 딸아이가 늦는다. '띵!'하고 엘리베이터가 와 멈추는 소리에 이어 감지되는 발걸음 소리. 그것은 분명 집으로 돌아오는 딸아이가 분명하다. 이제 곧 발걸음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리다 멎을 것이고 이내 벨이 울릴 것이다.
산다는 것이란 이렇게 서로의 발걸음 소리를 사랑으로 확인하는 행위일 것 같다. 그러나 발걸음 소리가 항상 반가운 것만은 아녔다. 발걸음 소리가 너무너무 무섭고 두려웠던 기억도 있다.
내 어렸을 때는 손전등 같ㅇ느 것은 아주 구하기 힘든 때였다. 그래서 밤에 어디에 나갈 때는 등잔을 안에 넣은 네모난 등을 막대기 끝에 매달아 들고 다녔다. 등의 4면은 한지韓紙를 붙이거나 유리를 끼웠다. 그리고 뚜껑에는 구멍을 뚫어 불꽃 끝이 밖으로 향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뚫린 그 구멍으로 바람과 비가 들어가 불을 꺼버리곤 했다.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손으로 그 구멍 쪽을 막기도 해 보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미처 돌아오지 않으면 등을 들고나갔다. 등불을 들고도 무서움에 온몸이 땀에 젖을 지경인데 불까지 꺼지면 아주 깊고 깊은 바닷속에 빠뜨려진 것 같은 공포가 온몸을 감싸버린다. 그럴 때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반가움이나 구원의 소리이기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의 소리다. 내가 기다리는 발걸음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무서움이 더욱 커져간다. 급기야 걸음아 나 살려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누구의 발걸음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처럼 든든한 것도 없다. 아무리 낯선 곳이어도,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함께 가는 발걸음 소리는 '안심해, 내가 있어!'하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어른들과 함께 한밤중에 산을 넘던 때 아무런 두려움 없이 유난히 많기만 하던 별을 헤던 것도 그렇다. 등불을 들고 기다리노라면 이윽고 저만치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우리 식구일 거라는 느낌이 온다. 거기다 불빛만 보고도 벌써 나인 걸 알아차리고 저만치서 '원현이냐?' 한 마디 해오면 어둠 속에서도 우린 단번에 서로를 알아본다.
근래 들어 사람 간에 정이 끊겼다고들 말한다. 정이 끊겼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눈빛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것은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말한다.
마음만 열면, 닫힌 가슴을 열면, 솔바람 지나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러면 꼭 가족만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더라도 다가오고 또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로 서로 마음이 통하고 정겨움이 통하지 않을까.
통한다는 것만큼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발걸음 소리를 귀가 아닌 가슴으로 한껏 느껴보고 싶다.
그가 내게로 오는 소리는 사랑이다. 내게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는 사랑의 소리이다. 어린 날 나를 든든하게 해 주던 발걸음 소리, 부부간에 사랑이 넘치던 이모님 네처럼 나도 다른 사람에게 반갑고 힘이 되어주는 발걸음 소리가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