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때 밥 먹는 일보다 절실한 게 또 있을까. 마음 편한 사람과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하는 식사는 행복하다. 뿐인가,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담소하며 먹는 밥은 소찬일지라도 즐겁다. 예수도 제자들과 둘러 앉아 담소하며 밥 먹는 일을 즐겼다. 그래서 당시의 말 좋아하는 무리는 예수가 비천한 이들과 먹는 일에만 열이 났다고 비난했다. 그래도 예수는 잡혀가기 전날 밤까지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이처럼 기꺼운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며 밥 먹는 일보다 더 값지고 성스러운 게 세상에 또 있으랴.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값진 목숨을 이어준다.
터미널에서 막냇자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외지에서 공부한답시고 석 달 만에 집에 오는 터라 마중 나와 있다. 버스 도착 시각이 좀 일러 대기실에 놓인 텔레비전 앞에 서 있는데 마침 떠들썩한 사건이 흘러나온다. 이역 바다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총을 맞은 이들이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실려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부모는 넋을 잃은 채 애통해한다. 가세가 가년스러워 고등학교밖에 보내지 못해 배를 타게 되었다며, 살아서 집에 돌아오면 먼저 배부르게 밥을 해먹이고 싶다며 눈물짓는다.
버스 한 대가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옆자리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중년 여인은 앞으로 내닫는다. 버스 문이 열리고 얼마 후 앳된 청년이 내린다. 여인은 청년을 보자마자 다가가더니 큰소리로 대뜸 하는 첫마디가 ‘밥 먹었느냐’다. 모자지간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밥 먹었느냐?’일 거다. 부모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자식의 목구망일 터, 밥은 목숨과 바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식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밥이 무엇보다 소중했으리라. 어머니에겐 자식의 사회적 지위나 명예보다도 밥이 더 절실한 문제이다. 제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목구멍으로 음식 넘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지 않던가. 솥에 쌀을 안치고 밥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식을 바라보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한 어느 어머니가 떠오른다. 자식의 배를 곯게 하는 일은 어머니로서는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리라.
이청준의 소설 <눈길>, 그 장면만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맨다. 이미 남에게 넘긴 집이지만 우리 집처럼 보이게 하려고 옷궤를 그 집에 갖다 놓는 것도, 새벽에 눈이 가득 내린 어둑한 산길을 걸어 아들을 장터 차부까지 데려다 주는 것도, 아들이 떠난 뒤 어둠 속에서 망연히 차부에 앉아 있는 것도,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눈 위에 선명한 것도, 그 길을 되밟고 아들이 달려올 것만 같아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아니다. 그건 바로 눈길을 밟고 떠나는 자식에게 마지막으로 밥을 해 먹이기 위해 어둑새벽에 쌀을 씻었을 그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떤 어머닌들 그렇지 않으랴. 내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릴 적, 농번기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뭇가지에 고무줄을 매단 새총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때마침 마당 귀퉁이에서 먹이를 찾는 닭이 눈에 들어왔다. 맥쩍고 심심하던 터라 닭을 향해 돌맹이를 날렸는데, 그만 그게 대가리에 맞아 닭은 그 자리에서 바르작거리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장난삼아 쏜 새총에 정통으로 닭이 맞아 쓰러진 것이다. 어머니께 혼이 날 것은 분명한 일, 겁이 덜컥 났다. 그 암탉은 하루에 달걀을 두 개씩이나 낳아서 어머니는 읍내 닷새 장에 팔아 가용을 마련해 쓰는 소중한 닭이기 때문이었다. 이부제 수업인지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밥이고 뭐고 팽개치고 뒷길로 달아나 학교로 도망치고 말았다.
해거름 무렵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마당에 널브러져 있을 닭을 본 어머니의 표정이 떠올랐다. 게다가 연전에도 장독대에 앉아 있는 도둑고양이를 맞춘다는 게 그만 장 항아리를 새총으로 깨뜨려 혼난 적이 있기에 더더욱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길 않았다. 날은 어둑해지건만 마을이 보이는 저편 산모롱이에서 맴돌 뿐이었다. 저녁까지 걸렀으니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연방 났다. 하지만 어둑한 산자락 밑에 먹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차츰 달은 떠 밝아오는 데도 애솔나무 근처에 무덤이 있어 무섭기만 했다. 게다가 허기가 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발치에 젖은 고추밭이 눈에 들어왔다. 배고픈 나머지 고추밭으로 들어갔다. 대충 때운 아침밥에다가 긴긴 여름날 두 끼를 굶었으니 허기가 질 수밖에 없었다. 고추라도 따먹어야 허기를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겁지겁 예닐곱 개를 따서 씹어 먹고 나니 속이 화끈거리고 목젖이 얼얼하여 눈물이 갈쌍거렸다.
차차 밤은 이슥해 가고 사위가 괴괴해 무섬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야단을 맞더라도 집으로 가는 게 나을 성싶었다. 바장이다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고 동구 근처에 도착했을 때 저편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가다갈수록 불빛은 어머니일 것이라는 느낌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그래, 맞았다. 어머니는 장명등을 들고 미루나무 곁에 우련히 서 있었다. 밤이슬에 젖은 채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어머니도 달빛 속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자식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라는 생각에 겁을 먹은 채 다가갔다. 한데 첫마디, 어머니의 목청은 이번엔 낮게 떨려 있었다.
‘어쨌느냐, 밥은!’ 어린 자식은 그만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고개 숙이고 달려들어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앙앙 울고 말았다. 어머니는 박박 깎은 자식의 머리통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왜 그렇게 울음이 터졌는지를 몰랐다. 수십 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의 그 말을 이때껏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 세월 흘러 그 자식이 아비가 되었다. 조금 후 버스가 도착하면 그 아비의 자식이 버스에서 내리리라. 맨 먼저 무슨 말이 입 밖으로 나올지 아비는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