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 / 김영희

 

 

뻥친다는 말이 있다. 뻥치는 것은 거짓말이나 허풍으로 쓰인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이곳저곳에서 뻥치는 소리가 난무한다. 오랜만에 찾아간 절에서도 뻥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남쪽으로 차를 몰아 평소 가보고 싶었던 사찰을 찾았다. 평일이라 주위는 고즈넉했다.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도량은 정갈했으며 갖가지 나무와 꽃들은 봄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었다. 대웅전 앞에는 겹벚꽃이 활짝 피어 계절은 온통 화사한 봄의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부처님께 삼배하고 대웅전 뒤의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과 전각 사이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장독대에서 행자가 독을 닦으며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전각에 들어섰다. 주위는 고요해 아물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속삭임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변성기를 지난 청년의 목소리였다. 졸음이 몰려올 정도의 나른함에서 한순간 깨어났다. 장독대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림이 귀에 거슬려 경을 소리 내어 읽으며 기도에 집중했다.

기도가 끝나고 앉아있는데 여전히 자분자분 얘기 소리가 들렸다. 청년이 무슨 말을 하면 행자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해맑은 웃음은 그날의 날씨만큼 청량했다. 웃음이 그치는가 싶으면 청년은 또 무슨 말인가를 해 행자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데 저렇게 웃는지 궁금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들릴 듯 말 듯 한 얘기였지만 웃음소리만큼은 선명했다.

전각을 나오니 청년은 큰 독을 닦고 있는 행자를 따라다니며 연신 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장독대 옆에는 핑크빛 겹벚꽃이 팝콘처럼 툭 툭 터져 벙글어졌다. 꽃잎이 바람에 포르르 흩날려 항아리에 내려앉은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깨끗하고 투명했다. 두 사람은 내가 지나가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장독대를 지나며 청년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계곡을 따라 난 길로 산책하러 갈까요?” 젊은 것이 되바라진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수련하는 행자를 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비구니 사찰에서 젊은 총각은 순진한 행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얼마나 뻥을 쳤을까. 알듯 말듯 모호한 감정에 빠진 사춘기 행자의 웃음에 총각도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봄날 겹벚꽃이 만개하면 장독대 두 남녀의 모습이 어김없이 되뇌어진다.

올해 중년 여인들은 쑥을 캐러 도심을 벗어났다. 코로나가 풀렸으니 짬을 내어 우리가 봐 둔 밭으로 갔다. 얕은 야산 아래 비스듬한 밭은 덤불이 웃자랐지만 쑥은 지천이었다.

밭 한쪽에 자리를 깔고 준비해 간 점심을 펼쳤다. 김밥, 물, 김치, 커피, 과일까지 그득한 한 상이 차려졌다. 우리가 먹고 있는데 낯선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왔다. 허리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동네 토박이분인가 여겨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근처 밭고랑을 일구고 있는 동생에게 간다고 했다.

과일과 커피를 드렸더니 기뻐하셨다. 어디서 왔는지 묻더니 느닷없이 “나물 좀 해 가소. 나물이 많니더.” 했다. 순간 우리는 할아버지 밭에 나물이 많아 주시려나보다 생각했다. “할아버지 밭은 어디 있어요.” 했더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앉아 있는 뒤편 야산을 가리키며 “저기 산에 각종 산나물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조심해야 해요. 산에서 잘못해 구르면 다치니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할아버지는 묻지 않는 말을 계속했다. 시내에서 장사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 집을 지어 이곳에 정착했다. 지금은 아픈 곳이 많아 일은 못 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운동 삼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조심해야 한다며 이 동네는 풍경이 좋고 인심이 좋으니 자주 오라고 했다.

자주 오면 건넛집에 블루베리를 하는데 자신이 얘기하면 좀 줄 것이라고 했다. “그분을 잘 아세요?” 물으니 안 지 이틀 되었다는 말에 우리는 또 한 번 자지러졌다. 땅은 오래전 사두었고 얼마 전에 집을 지어 이 동네로 이사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얘기에 우리는 연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장사해서인지 입담이 좋아 주변을 즐겁게 했다. 말에는 뻥이 많았지만 우리를 끊임없이 웃게 했다. 중년 여인들은 한참을 웃었더니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었다.

덤불 사이를 헤치니 연하고 보드라운 쑥이 그늘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물을 캐며 우리는 할아버지 말을 복기하며 웃고 또 웃었다. 젊은 시절엔 누군가 시시껄렁한 말을 하면 못 들은 척 상대도 안 했다. 이제는 나이 탓인지 뻥인 줄 알지만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주위를 둘러보니 건넛산은 연초록 잎이 다투어 올라오고 겹벚꽃은 터져서 만화방창이다. 우리의 마음도 신록처럼 유순해진다. 자연이 순하니 마음마저 닮아간다. 농담 속에 담긴 뻥은 순하게 물들어 가는 풍경만큼 중년 여인들을 즐겁게 했다. 우리는 할아버지 말 속에 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웃어주었다. 사는 것이 때로는 한순간의 뻥처럼 여겨질 때도 있는 것처럼. 봄은 만물을 부드럽게 하고 소생하게 하며 달뜨게 한다. 한순간의 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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