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을 마치고 승강기를 기다리는데, 한 노인이 오더니 “선생님, 정말 100세 넘으셨습니까?” 물었다. 할 말이 없어 “어머니께서 알려준 나이니까 맞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노인은 “저는 92세인데요…”라면서 떠나갔다. 자기 나이와 비교해 내 모습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나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90을 넘긴 건 확실하다. 80대에 아내를 보내곤 집이 비어 있는 것 같더니, 90에 안병욱·김태길 교수와 작별한 후에는 세상이 빈 것처럼 허전했다. 그런데 어느새 100세를 넘겼다는 사실엔 나조차 공감하기 쉽지 않다.
100세가 넘어 제주나 부산으로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난처한 일을 겪었다. 내 주민증으로 예약한 탑승권은 기계가 인식하지 못한다. 02세가 되기도 하고 탑승권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한참 조사해 본 직원은 “세 자리 숫자는 컴퓨터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몇 년 더 지나면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요사이는 주변에서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내가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까 봐 걱정이란다. 연세대 제자들과 모임을 하고 혼자 떠나는데 제자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오면서 나를 살펴주었다. 자기 부친은 길을 못 찾아 파출소까지 가곤 한다고 했다.
좋은 점도 있다. 약간 알려진 식당에 가면 나도 모르는 제자들이나 손님이 식대를 대신 내주기도 한다. 처음 만난 분이 애독자라며 또는 저희를 위해 수고하셨다며 점심 값을 내준다. 집 가까이에 있는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는 오래전부터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조심스럽고, 비싼 식사는 사양하게 된다.
몇 년 전 KBS에 출연하였는데 대담자가 “혼자 오래 사셨는데 여자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색해서 “생각은 간절하지만 요사이는 너무 바빠서 안 될 것 같다. 2년쯤 후에는 신문에 ‘여자 친구를 기다린다’는 광고를 낼 작정”이라고 했다. 모두 웃었다. 100세 전까지는 누군지 모르는 할머니들이 정말 “그 신문 광고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100세가 한계선이었다. 모든 할머니가 다 떠나 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지난 연말이었다. 문학인들이 모이는 남산 ‘문학의 집·서울’ 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낭송했다. 윤동주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한 내 인생의 첫 시인이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난 후에 구상 시인이 마지막 시인이 되었다. 죽음을 예견하는 병중에 있을 때 나에게 보낸 시가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시작했는데 ‘죽음의 문 앞에 서니까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죄인이었다’라는 시였다. 동주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길을 걷지도 못하고 목숨을 빼앗겼다. ‘그리고’ 대신에 ‘그래도’라고 했더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나도 머지않아 삶을 마감하는 문을 열어야 한다. “여러분과 함께 있어 행복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할 것 같다. 그날 낭송회에서 나도 모르게 새해 소망을 말했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나도 여러분과 같이 시를 쓰다가 가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나는 사회 속에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해 왔다. 100세를 넘기면서 나 자신을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 예술을 남기는 여생을 갖고 싶었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그제야 알았다.
내 새해 소망은 시인이다. 시다운 시를 쓰지 못하면 산문이라도 남기고 싶다. 100세가 넘으면 1년이 과거의 10년만큼 소중해진다.
박돈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