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 김서령

 

20년 넘게 내가 사는 뜰에는 목련이 피었다해마다 꽃 피는 전과정을 지켜봤다책상 앞 바로 눈높이에 목련이 있어 눈을 들면 절로 목련과 마주 보지 않을 수 없었다겨울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차츰 볕이 달궈지는 어느 날가슴 안쪽에서 문득 수상한 동계가 감지되는 어느 날목련의 첫 꽃은 툭 소리를 내며 터진다나는 흥분해서 43일 혹은 4월 6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날을 기록했다.

20대엔 그저 좋기만 했다잎 없는 가지에서 커다란 목련을 불러내는 주체가 뭔지도 몰랐다무뚝뚝한 회색 가지 안에서 무심코 꽃이 툭 튀어 나오는 줄만 알았다내 기분이 좋으면 팝콘처럼 즐겁게 터지는군 싶었고내 심사가 사나우면 뭐가 좋은 세상이라고 철없이도 피어대는군 싶었다.

내 아니 스물여섯에서 서른여섯에서 마흔여섯이 됐다목련은 해마다 피었다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열매가 아니라 꽃만 피우면 임무 끝이니 게으름을 피울 핑계가 없었을까그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고 죽은 강아지를 나무 아래 묻었다그래 그런지 꽃은 밥사발보다 커졌다요즘 밥 먹는 아잘찮은 밥공기가 아니라 내 어린 날 일꾼 밥을 퍼주던 두터운 사기사발보다 더 컸다는 말이다.

 

​ 해마다 꽃을 내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개화의 순간을 싱겁거나 실없다고 여기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줄어 갔다그러다 알게 됐다목련은 내가 기록하는 그날이 아니라 석 달 전부터 아니 여섯 달 전부터 이미 꽃을 배고 있었다는 걸꽃피는 날은 그 밴 꽃을 날마다 조금씩 키워 드디어 해산하는 날이란 걸. 4월이 아니라 3월 초부터 목련은 매일 기쁨과 고통을 반복하며 제가 만든 세상을 조금씩 들이미는 진통을 시작한다는 것을.

꽃피는 순간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을까그토록 무표정하고 고집스럽게 추위 속에서 꽃의 아기를 보호하던 겨울 눈추하다고 할 만하게 털이 숭숭하고 거칠고 딱딱하던 그 회색껍질이 맨 처음 땅에 툭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봄마다 책상 앞에 앉아 듣는다때로 우박처럼 한꺼번에 두두둑 떨어지기도 한다봄밤의 장엄하고 흐드러진 음향이다흐드러진 생명의 음향이되 죽음의 음향이다.

생살을 찢으며 아이를 낳아본 어미인 내게명백히 이제 죽는구나 싶은 순간을 맛보았던 내게양다리 사이로 물컹하며 바닷물 같은 핏덩어리가 빠져나가던 절대 시간을 경험했던 내게 그 소리는 물질이 다른 물질에 부딪치는 객관음향일 수가 없다공포와 환희의 그보다 큰 무상감이 둥그렇게 구름 이루던 시간그 둥그런 감각이 목련의 겨울눈 깍지가 마당 위로 탁탁 떨어지는 봄날 새벽 내게 서늘하게 다시 찾아온다소리 안에 담긴 꽃피우는 놈의 불안과 공포와 환희를 낱낱이 헤아려낼 듯 나는 책상 앞에 곧추 앉아 있다우주가 둥그렇게 나와 목련 주변을 성근 원으로 감싼다.

저 목련의 거무튀튀한 겨울눈이 정반대의 빛깔을 제 껍질 안에 숨겨 두고 있다는 것그것은 해마다 확인해도 번번이 경악할 만한 반전이다설계자의 각본엔 봄이 세상의 명도를 갑자기 높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꽃잎의 환한 우윳빛이 칙칙하고 지루한 회색을 흔들어 떨구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게 우연일 리 없다이토록 커다란 반전을 기획한 의도가 뭘까나를 비롯한 목련을 바라보는 모든 생명그들의 가슴을 더 세차게 흔들어 놓기 위해서일 거라고 나는 해석한다흔들어서 뭣하냐고각자 제 생명을 충분히 만끽하고 땅 위에 넘치도록 번성하라는 것일테지.

봄날의 햇볕과 바람엔움직일 줄 아는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들까지 모조리 화들짝 놀라게 하고 싶은 신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각자 제 핏줄 속에 소스라쳐 흐르기 시작하는 피톨들의 잉잉대는 소리를 들어보라 세상 꽃들이 모조리 작당을 하는 거다.

아직 실내는 어둡다그러나 바깥엔 저만치 봄이 오고 있다곧 꽃들이 필 것이다아이에게 맨 처음 새 이빨이 돋듯잇몸 위에 발갛게 피가 맺히듯모든 꽃의 끄트머리엔 조금씩 핏물이 돈다꽃은 결국 제 어미나무의 실핏줄을 터뜨리며 핀다벌써 아래쪽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다.

둔감을 위장하고 있는 저 겨울눈의 깍지는 제 안에 환한 생명을 감춘 채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1월에도 이미 입술 그리는 모필보다야 훨씬 컸던 저것이 어느새 우리 아버지 어릴 적 <동몽선습>을 베껴 썼다는 붓만 하게 변했다. 3월이 이윽하면 그중 장한 놈은 추사가 귀양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써서 걸었다는 무량수전을 쓴 모필만 하게 자랄 거다이제 나의 봄은 머리 위로 흔들리는 수백 송이 꽃송이 안에만 있지는 않다목련나무 아래 가득 널브러진 수천 조각 겨울눈의 누추한 깍지들 속에도 있다.

겨울눈이 움쑥움쑥 자라고 있다곧 3월이 오리라날마다 커가는 겨울눈을 들여다본 눈이라야 목련의 개화를 즐길 자격이 있다흰 타월을 던지듯 뚝뚝 떨어지는 그놈의 처절한 낙화그 순간까지 실컷 음미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저 겨울눈과 친해져야 한다적어도 그게 꽃구경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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