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들면 삶의 답이 보인다 / 이은택

 

 

새벽닭이 운다. 수탉이 네 번 울면 샛별이 돋고 창호지 문살에는 파르스름한 여명 빛깔이 번진다. 그러면 서둘러 망태기 하나 어깨에 걸고 농막을 나선다. 흙뜰을 내려서면 숲이 보이고 몇 발짝 걸으면 산길로 이어진다. 산 밑에 초막 한 칸을 짓고 사니 농막 댓마루 끝이 바로 산인 셈이다. 청명 한식이 지난 4월 7일이고 보니 봄은 이미 산자락 가득히 젖어들어 쑥이며 홑잎나물 등 새 풀 냄새가 상큼하기 그지없다.

숨 죽였던 씨눈들이 태죽태죽 눈을 뜨고 연녹색의 목피들도 봄맞이가 한창이다. 저마다 그들 몫만큼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들이다. 어떤 나무는 아름드리 몸통에 하늘을 가릴듯한 우람하게 자란 나무도 있고, 또 어떤 나무는 가냘프게 높이 치솟기만 하고 가지는 끝 부분에만 몇 개 달린 채 미풍에도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나무들도 있다.

모두 간벌間伐 없이 자연 그대로 자란 밀림 때문이고 햇빛을 보지 못한 음극陰極 탓이기는 하나 은밀하고 조용한 숲의 이면에 나타나는 삶의 경쟁은 참혹하리 만큼 치열하다. 영역싸움에 밀려나고 선점先占에 쫓겨 가차없이 희생당한 몰골이 삼림森林에 가득하다.

뿌리는 얻었으나 활엽活葉할 수가 없었고 몇 개 잎새는 돋았으나 빛을 보지 못해 말라죽은 뼈대들이 부엽腐葉 사이로 뒹군다.

선악善惡을 따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자연현상이기는 하나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없어 죽을 수밖에는 없다. 하나 극음極陰을 벗어나려고 수십 년간 각고의 노력을 한듯 몸을 비틀며 양지로 얼굴을 내민 장송의 푸른 솔기에는 나른한 봄결이 스멀스멀 얹혀있다. 나무는 죽어서도 그냥 썩지는 않는다. 부식되어 가는 속은 작은 곤충들에게 내주고 피부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한 푸른 이끼를 한가득 키우고 있다. 자연에 일조一助를 하는 가치있는 부식인 것이다.

몸통 둘레가 2m에 달하고 높이 50여 미터에 이르는 굴참나무도 많다. 사방으로 내뻗은 굵은 가지들의 지폭枝幅 또한 대단히 넓어 산의 품격마저 높여주고 있다. 가을이면 도토리를 무한정 내어주고 두껍게 휘감은 굴피 역시 수백 채의 굴피집을 짓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다. 아름드리로 굵은 산뽕나무에 어른 팔뚝 만큼씩 자란 으름덩굴[木通, 蒴果]과 다래나무 덩굴들이 휘휘친친 감고 돌아 총림叢林을 이룬 그 그림들은 신비스러울 만큼 산중비경山中秘境이다.

혼자 서 있는 나무는 하나의 나무일 뿐 숲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숲이 없는 산은 그냥 볼품 없는 능선일 뿐 산이라기에는 어설프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산은 보이나 숲은 보이지 않고, 또 일단 숲에 들면 숲은 보이지만 산은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을 일컬어 시각차이라고도 하고 심폭心幅의 느낌이라고도 하는데, 말하자면 어느 스님 말마따나 “눈 들어 보니 산이고, 마음을 여니 숲이더라[擧眼山 開心林]”는 말과 비슷한 얘기 아니겠는가.

뒤집어[倒替] 얘기하자면 사람을 만나되 그 사람의 심덕心德은 보이지 않고 얼굴만 보이며, 화려하게 잘 지은 집에 들어가면 집만 보일뿐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품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시각일 테다. 담장 높은 거각에 살지라도 거주하는 인간이 악질이라면 흉가일 테고, 한 칸 띠집[一間茅屋]에 살지언정 그 띠집에 담겨 사는 사람이 참다운 덕인德人이라면, 그 집은 아름다운 집 아니겠는가.

거목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비바람에 중심이 부러져 반동강이로 살아 겨우 숨만 붙어있는 가여운 토종 소나무 한 그루를 본다. 잘못 심겨져 불운한 한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번식본능은 타고난 질감이어서 작은 솔방울 두 개는 달고 있다. 안타까워 처연한 생각마저 든다. 활생活生하지 못한 왜소한 생물일지언정 못난 그 태깔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평소 게으름뱅이었던 나도 얼핏 삶의 답이 보이는 것 같다.

잘 살았는지? 아니었다. 그릇이 모자라 주어진 여건도 선용, 활용하지 못했고, 고된 삶의 방정식을 옳게 풀지도 못했으며 그 등식等式을 뛰어 넘지도 못한 채 세월만 보냈다. 그의 답答은 늙음뿐이었다. 영락없이 성 쌓고 남은 돌[築城餘石]이고, 숲을 이루다가 버려진 한 그루 나무[成林弊木]에 불과하여 저기 저 중심이 부러진 채 달랑 솔방울 두 개 달고 초라하게 늙는 토종 소나무의 삶과 같다. 그것이 나의 삶과 닮은꼴이어서 추연한 생각도 든다.

숲에 들면 이처럼 삶의 답도 보이고 덧없이 보낸 세월 뒤돌아볼 수도 있다. 양지 바른 능선에 실한 뿌리를 내리고 잘 자란 거목을 만나면 수만 명의 산업일꾼을 거느린 재벌총수 같다는 느낌, 그리고 빛깔 고운 붉은 피부로 웃자라 용케 햇빛 잘 받는 틈새를 비집고 푸른 솔가지 넘실거리며 솔내 풍기는 근사한 장송을 보면, 군더더기 없이 청아淸雅하게 늙는 학자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근처에 갔다 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덤벼들어 할퀴고 쥐어뜯고 가시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고 상처를 내려는 찔레나무 덩굴과 망개나무 덩굴은 사회악의 축軸을 이루는 사기집단과 절도범, 폭력배와 유사하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어쨌거나 말없이 자연으로 섭생하며 살고있는 숲과, 감정과 의사를 언어와 규율로 통제하는 인간사회와의 유사성은 그 근착주생根着柱生* 하는 이치와 윤보환생輪步還生*하는 법칙이 거의 대동소이하여 그 심오한 유타동비類他同比*의 경지를 깨닫게도 한다.

차츰 여명이 걷히며 붉은 해가 솟는다. 그러자 산꿩, 산비둘기, 까마귀, 산까치 등 온갖 날짐승들의 울음이 시작되는데 하나같이 시장기 가득한 본능의 소리다. 무엇으로 먹이사슬을 이어가며 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나 알 길은 없다.

 

 

* 근착주생根着柱生: 뿌리를 내리고 기둥처럼 성장한다는 뜻.

* 윤보환생輪步還生: 수레바퀴처럼 천천히 굴러가며 동그랗게 환생한다는 뜻으로 불교용어임.

* 유타동비類他同比: 종류는 다르나 거의 같은 비율로 나간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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