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들도 나목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잘못 살아온 인생을 가을에 한 번씩 낙엽으로 청산하고 새봄이 오면 다시 시작하는 재생의 기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의 최대 명절인 추석을 지낸지 오래다. 아침저녁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드높고 푸른 하늘, 들길에는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고 북쪽 산간지방에서는 성급하게 무서리가 내렸다는 소식과 함께 단풍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가을은 창문을 통해 온다. 봄에는 겨우내 꽁꽁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가을엔 여름 내내 활짝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던 커튼을 내린다. 커튼이 닫힌 서재에 촛불을 밝히고 오랜만에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손때 묻은 고서를 편다. 호젓한 나만의 세계가 열린다.
지난여름 흥분된 열기 따라 내 사유思惟는 영상과 스포츠에 빼앗기고 멍하니 세월만 보냈다. 이젠 삽상한 가을을 맞아 잃었던 나의 사유를 찾아 나선다. 죽었던 나를 되살린다.
나의 자아는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리의 영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홍수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지식 정보와 세속적 안일과 나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인심이 그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리와 아집을 버리고 순명의 화두를 강물에 띄우는 일이다.
순명의 화두는 자연밖에 없다. 공맹의 명저를 뒤적이며 철학을 찾고 심오한 종교를 통해 인간의 존재나 행방을 논하는 것은 과분한 욕심이요, 외식인지 모른다. 골치가 아프고 답답할 뿐이다. 나를 찾는 데는 한 그루 나무, 한 송이의 꽃이 있으면 족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 자리에 자리 잡고 서 있으면서도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며 그를 통해 많은 의미와 진리를 인간에게 전해 주고 있다.
나의 출근길에는 아파트 문을 나오기가 바쁘게 오랜 세월이 정박한 가로수가 즐비하게 서서 나의 출근길을 배웅한다. 도로변에는 버드나무, 그 안쪽 인도에는 은행나무 그리고 또 그 안쪽 언덕바지엔 벚꽃나무가 앞을 다투어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한다. 가지와 잎새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그들의 몸짓은 철 따라 변신한다. 봄에는 새싹, 여름엔 녹음, 가을엔 단풍, 겨울엔 나목으로 계절의 감각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