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 / 박금아
비가 오는 날이었다. 혜화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사당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두 개나 들고 있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았다.
옆 경로석에서 노인 두 명이 이야기를 하며 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내게 맞은편 빈자리에 앉으라며 눈짓을 보내왔다. 경로석에 앉을 나이가 아니라고 하기도 곤란해서 의자에 가방을 올려놓고 서 있었다. 키가 큰 오른쪽 노인은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왼쪽에 앉은 작은 키의 할아버지는 달랐다. 앉았다가 비워 주면 될 걸 왜 그리 융통성이 없냐며, 세상을 자로 재듯이 딱딱 잘라서 살면 안 된다며 야단이라도 칠 기세였다.
동창 모임에서 오는 길인 듯했다. 작은 키 노인이 친구들 이름을 대가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들에, 딸에, 사위 며느리에 손주까지 잘 지은 자식 농사 이야기며, 여러 곳에 재산을 기부한 동창들의 미담들을 전하며 그만하면 인생 잘 산 거라고 했다. 큰 키 할아버지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훈훈한 이야기에 귀동냥하는 나도 흐뭇해졌다.
키가 작은 노인이 가방을 열더니 전화기를 꺼내어 받았다.
“아, 김 여사구먼. 잘 지내고말고. 만나자고? 아이고. 막 회현을 지나버렸네. 어쩌나, 아쉬워서……. 김 여사, 날 잡아서 산에 한 번 같이 갑시다. 당신, 정말 최고로 멋진 여자야.”
통화를 끝낸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전광판을 보더니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 들었다.
“삼각지를 지나면 꼭 생각나는 여자가 있어.”
그는 이미 발신 중이었다.
“응, 김 여사. 요즘 어찌 지내시나? 나는 잘살고 있지. 당신을 못 만나서 외롭지만……. 지하철 탔는데 삼각지를 지나네. 당신 생각이 나서…….”
내 귀를 의심했다.
“응……. 비가 많이 오네. 비 오는 날 우리 삼각지에서 자주 만났잖아. 아, 그때가 좋았는데. 당신도 기억하고 있구먼. 당신 그때 참 예뻤지. 다음엔 시간 갖고 전화할게. 김00! 당신 참 멋져. 아름답고. 아! 정말 보고 싶다.”
세상에! 동창 이야기할 땐 점잖은 말만 하더니 같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지 기가 막혔다. 전화를 끊은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전형적인 수작질이었다. 나도 모르게 갈퀴눈이 되어 째려보았다.
‘당신 제비죠? 조금 전에는 다른 여자더러 최고로 멋지다고 하더니…….’
내 눈에서 광속으로 뿜어져 나오는 레이저를 감지했을 테니 부끄러워할 거로 여겼다. 내가 통화 내용을 들었다는 걸 알고 무안해하는 것 같았다. 금방 눈을 내리깔더니 두 손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요사이 남편의 외도로 골머리를 앓다가 졸혼을 결심한 친구를 떠올리며 그를 향해 레이저를 쏘아댔다. 그때였다. 목이 잠긴 듯한 소리가 났다.
“아이참. 또 이러네…….”
노인은 울고 있었다. 옆 할아버지에게 손수건이 있냐고 물어서 보니 콧물까지 나와 있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김00 말이야, 그 여자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져. 그렇게 작은 몸집으로 시장에서 종일 장사하고 수십 년째 식물인간 된 남편 수발하고. 장애아들까지. 참 이뿌고 공부도 잘했는데……. 오늘처럼 동창회에 나와서 밥 먹고 잘 놀다가 가면 꼭 생각나고 미안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로 마음이 아리는 거야. 그런데도 늘 웃어. 어떻게 그리 잘 살아갈 수가 있냔 말이야. 그 여자 참…….”
사당역이었다. 일어나 아까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두어 번인가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내가 내비쳤던 속된 마음을 알아 버린 것 같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억들은 그 자리에서 저 홀로 풍경이 되어 걸리는가 보다. 비 내리는 날, 삼각지역을 지날 때면 ‘그 여자’가 떠오른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콧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울던 작은 키 할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