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만나다 / 정영자
덕수궁미술관으로 가는 길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상앗빛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섰다. 주중이라 그런지 전시실은 비교적 한산했고 어두웠다. 전시는 연대와 작가별로 구성하여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장 안을 천천히 걸으며 한 작품씩 보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혼란의 시대에도 자신의 예술혼을 꿋꿋하게 불태우며 태어난 작품들이 반세기를 넘어서 대중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작품들 앞에 서서 한동안 바라본다. 작품 속의 인물들과의 거리는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작품 속 인물들과 현재의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감격스러움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고단한 삶의 지평에서 그들이 지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피난 시절 해군 종군 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린 김환기의 작품 ‘피란열차’ 앞에 섰다. 네모 상자 같은 열차에 성냥개비처럼 들어찬 사람들. 눈이 부시게 새파란 하늘과 붉은 땅의 대비가 너무나 단순명료해서 당시의 처절한 상황이 너무나 아프게 각인됐다. 표정이 없는 둥그런 얼굴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화폭을 메운 새파란 하늘처럼,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피난 열차를 탄 그들이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었으리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이 커다란 화폭에 담겨있다. 언젠가 지층 공부를 한답시고 들로 바닷가로 쫓아다닐 때, 바위 표면에 무늬로 새겨진 벌집타포니를 보며 나는 이 그림을 떠올렸었다. 수많은 점이 모여 밤하늘의 별을 보듯 한 이 그림은, 화가가 타국에서 살면서 고향 산천이 그리워서 한 점, 친구가 그리워서 한 점…, 그렇게 찍으면서 그렸다고 한다. 단단한 바위 표면에 벌집타포니를 만들어 낸 바람의 흔적과 인연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점점이 찍어 그린 사유의 흔적이 시공간을 넘어 서로 만나는 듯 환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영혼이 열리는 인연의 순간을 몇 번이나 맞이하게 될까. ‘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라는 김광섭의 시를 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또 하나의 인연을 떠올린다.
대향 이중섭. 그와 만남은 이십 대 초반에 읽었던 소설에서 시작한다. 책 표지에 흑백으로 입힌 고뇌에 찬 이중섭의 얼굴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당시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과의 괴리를 느끼며 방황하던 나에게, 아내와 두 아들과 어머니를 향한 한없는 그리움과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사랑은 세찬 빗줄기처럼 가슴을 적셨다. 가족과의 이별 앞에서도, 시대적인 아픔으로 인한 불행 속에서도 손 놓지 못하고 그려야만 했던 고독한 남자. 사람은 처한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지만, 자아의 힘에 영적인 힘을 더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데 어렴풋이 눈을 떴다.
이중섭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여느 전시실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황소’ 앞에 섰다. 그토록 보기를 소원하던 작품과 만나는 순간이다. 생각을 잠재우고 그냥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여기에 오기 전에는 작품을 보는 순간 벅찬 감동의 물결이 밀려올 줄 알았다. 하지만 속없이 눈물만 흘렀다. 이중섭의 소는 겨레의 혼이면서 또한 자화상이며, 범접하기 어려운 열정을 뿜어낸다고 뭇 사람들 앞에서 얘기했었는데, 화폭에 스며있는 붉은색이 비극의 원형인 듯 슬프게 느껴졌다. 명화라 불리는 저 그림의 이면에 스며들었을 삶의 고달픔과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이 울부짖듯 벌린 소의 입에서 포효하는 듯했다.
화가에게 그린다는 것은 삶의 전부인가라고 질문을 해본다.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 합쳐도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못할 것이라던 이중섭. 끝내 말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닫아버린 채 괴로워하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이중섭. 그는 혼으로나마 아내에게로 돌아갔을까. 황소의 슬픈 눈 속으로 작고 여린 한 여인의 실루엣이 겹쳐진다.
하나의 줄기에서 여러 개의 뿌리가 뻗어나가 커다란 나무로 자라듯이, 얼기설기 엮어지며 살아가는 삶의 인연들이 그림과 그림 위에서 춤추고 있다. 한 점의 명화가 태어난다는 건 누군가의 눈물 어린 희생이 따라야 했던 것은 아닐까. 화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전시실을 나섰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겨울 마지막 눈이 아닐까….
봄이 몹시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