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산엔 노랑꽃 / 장 돈 식
눈이 내린다. 기상대가 기상청으로 격을 높이더니 적중률이 제법이다. 예보대로 굼실거리던 하늘은 새벽녘에 비로 시작하더니 낮부터는 눈으로 이어졌다. 산에서 내려와 시내 책방을 돌며 비를 맞고 돌아올 때는 눈 내리는 산을 오른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일세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리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리리
머물 곳 그 어딘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으리
흘러간 노래의 생각나는 대목만 흥얼거리며 산길을 오른다. 하루 한 번의 등산은 산방에 머무는 동안 꼭 하는 내 일과 중 하나다. 그러나 설경을 즐기기에는 어정쩡한 계절이다. 썰렁한 바람에 뒹구는 낙엽이 을씨년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눈 내리는 지면에는 끝은 말랐으면서도 밑 부분에 푸르름을 당차게 간직한 푸새들이 빼곡하다. 몸도 마음도 볼품없이 늙었으면서 겉만은 뻔지르르 젊은 듯 꾸미려는 인간사에 비겨본다.
산모퉁이 곳곳에 핀 쑥부쟁이 노랑꽃은 지금이 한창이다. 온실이나 안방에서 화려하게 피는 국화의 원조는 이 초라한 꽃임에 틀림없다. 온화한 시절을 다른 꽃들에게 양보하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꽃을 피움은 무슨 까닭일까. 발길을 멈추고 꽃을 들여다본다.
식물과 곤충은 서로 도우며 사는 공생관계이다. 만약 산야의 모든 식물이 한 계절에 집중해서 꽃을 피우면 그 많은 꽃을 곤충들이 모두 수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꽃이 많이 피는 봄은 벌과 나비의 번식기인지라 많은 식량이 필요한 계절이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한편 꽃의 꿀과 꽃가루가 식량인 이 중매쟁이들은 산이나 들에 꽃이 끊겨 먹거리에 공백이 생기면 굶을 수밖에 없다. 조물주가 이른 봄 해빙기부터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 같은 계절까지 이엄이엄 꽃을 피우도록 배려한 이치가 오묘하다.
이곳 치악산과 백운산 언저리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것은 생강나무 꽃이다. 그 꽃은 노랗다. 산수유 꽃과 헷갈릴 정도로 닮았다. 아직 신록이 피어나기 전, 메마른 배경일 때 멀리 있는 벌과 나비들의 눈에 띄기 쉬운 색이 노란색임을 식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의 시작과 끝에는 노랑꽃만 핀다. 민들레도 냉이도 이른 계절의 꽃은 모두 노란색이라는 걸 자세히 관찰한 이들은 알 것이다.
날씨가 푸근해져 눈이 녹아 산에 바닥이 드러날 무렵에는 모든 꽃이 붉어진다. 진달래는 잎이 돋기도 전에 번식부터 서두르는 성급한 나무다. 온산이 분홍색이 되도록 일제히 꽃을 피운다. 눈이 없는 컴컴한 산에서는 붉은색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진달래와 달래 철쭉은 느긋해서 잎을 내면서 꽃을 피운다. 연두색 새싹이 뒤를 받쳐주는 시절의 꽃 색깔은 연연한 분홍이다.
기온이 차가운 북쪽의 철쭉은 흰색에 가까운 분홍이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색이 짙어진다. 이북 구월산의 철쭉과 남쪽 지리산의 철쭉은 다른 종류인가 의심할 정도로 색깔에 차이가 난다. 제주도로 가면 색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데 이는 배경을 이루는 산의 색깔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5월로 들어서면 모든 꽃의 색깔이 변한다. 며느리밥풀, 물봉숭아 등은 연분홍 꽃을 피우며 시절이 바뀜을 색으로 알려준다.
그러다 초여름에 이르면 상황이 일변한다. 산야는 짙은 푸르름으로 덮인다. 여름이 푸른 계절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의 타성에서 온 무감각 때문이다. 언젠가 아내가 실을 염색하는 것을 보고 자연현상과 비교해본 적이 있다. 실 한 타래를 물들이는 데는 물감 한 봉지가 든다. 그런데 뜰에 있는 사철나무를 인공염료로 물들인다고 하자. 색깔은 그만 못하면서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겨우내 퇴색한 산 하나를 사람이 의지로 여름의 푸르름처럼 색칠하고 어느 들판 하나를 물들인다고 치자. 좀 더 시야를 넓혀 대륙 하나를 인공색소로 염색한다고 치자. 가을에 다다라 단풍의 파도를 일으켜 일제히 붉게 바꿔 칠하는 조화는 또 어떤가. 이렇게 통찰을 확대하다 보노라면 조물주가 가꾸는 자연의 살림 규모와 그 운영의 치밀함에 외경심을 품게 된다.
그러면 푸른 계절을 사는 나무나 풀 들은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까? 모두 흰색이다. 산작약, 산목련, 도둑놈의 지팡이, 까치발꽃, 망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흰 꽃을 피운다. 여름에 색스러운 꽃이 있다면 그 꽃은 외래종이거나 인공으로 육종 개량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 산에 사는 함박꽃은 희지만 집함박꽃은 붉다. 집함박꽃은 중국이 원산지다.
이른 봄과 늦가을 눈으로 얼룩진 산에는 노란색이 주류이고 봄가을은 붉은 꽃, 청산에 피는 꽃은 희다. 이 절묘한 조화를 주관하는 의지가 있고 이 의지를 가리켜 하느님이라고 이름함에 이견을 가질 사람은 없으리라. 광활한 우주 중에 일부인 천계(天界)가 지계(地界)를 도와 생물을 탄생시키고 이 생물은 다시 식물과 동물로 나뉘어졌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의 삶을 발전시키는데 상대의 힘을 이용한다. 서로를 돕되 그 정교함이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억겁에 가까운 긴 역사를 가졌을 것이다. 이런 변화와 적응의 과정을 일컬어 창조라고 함이 아니겠는가.
동물과 식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한 바가 없는 나이기에 혹 전공하는 학자들에게 물어 지금의 이 관찰이 과학적 이론의 뒷받침을 얻는다면 얼마나 보람되랴. 빈 산야의 노랑꽃을 보며 나 자신은 인생의 사계절 중 어느 계절에 핀 어떤 색깔의 꽃인가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