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를 바라본다. 야트막한 산비탈엔 잡초가 우거져있고, 우거진 수풀 사이로 붕긋 솟은 봉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많은 무덤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장군의 묘일까. 망우당을 만나 뵈러 온 게 아니라 그의 문중 선산을 둘러보러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참을 헤맨 끝에 산 좌 중앙에 서있는 그의 묘 앞에 선다. 붉은 옷만 봐도 왜적들이 혼비백산했다던 천강 망우 당장 군의 묘는 주위의 무덤과 다르지 않다. 야트막한 봉분, 제물을 차려놓는 상석과 향로를 올려놓는 향로석뿐이다. (병조판서‧함경도관찰사‧망우당 곽충익공의 묘)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장군의 무덤치곤 너무 작고 허술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년시절 어머니께 홍의장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왔었는데, 내 상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나는 집에서는 어머니께, 외가에 가면 외숙께 홍의장군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기승전결, 소설처럼 틀이 잡혀있었다. 문장 하나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처음은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조상님께 누를 끼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서술은 짧고 명쾌했다. 하지만 본문은 길었다.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그러셨던지, 어머니는 생존해 계시던 할아버지 이야기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종조부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젊어서 너희 종조부께선 힘이 장사였더니라. 씨름대회에 나가 송아지를 몇 마리나 탔는지 모른다. 안골 밍(목화)밭도 그때 탄 송아지를 팔아 사간 기라. 학식 높은 종조부께서 눈을 부릅뜨고 삼단논법으로 따지고 들면 서슬 퍼런 왜놈 순사도 꼼짝 못 했지."
그러니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 결론도 본문만큼 길었다. 웃어른들을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하여야 한다. 물건을 받을 때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든다. 집을 찾아온 손님이 있으면 뛰어나가 맞이하고 가실 때는 삽짝 앞까지 나가 배웅해야 한다.
말이 교육이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듣다 보면 잔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토를 달수가 없었다. 몸을 뒤 튼다거나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지면 저만치 앉아계시던 아버지의 마른 기침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교육이 끝나면 어머니의 이야기는 친정집, 그러니까 내게는 외가 쪽으로 옮겨졌다.
멀리는 정승 판서를 지내셨던 윗대 할아버지, 가깝게는 힘이 장사였던 할아버지는 계셨어도 아쉽게도 우리 쪽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장군이 없었다. 나이가 어렸던 나와 형제들에겐 따분하기 그지없는 우리 집보다 외갓집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가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홍의장군 할아버지께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면 왜놈들이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데……."
어머니의 친정 쪽 이야기가 길어지면 아까와는 반대로 근엄하게 들렸던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까칠하게 날이 서있었다. '그깟 걸 가지고 우리 가문과 비교를 해!' 가부장적이셨던 아버지 편에선 장군의 이야기는 우리 가문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홍의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는 커가면서 외가 쪽 이야기만 나오면 본관(本貫)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가끔 길을 묻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 때가 있었다. 보따리를 받아들고 잰걸음으로 한발 앞서 걸으면.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네." 그냥 따라오는 게 심심하셨던지 길을 걷는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줄곧 누구 집 아들이냐? 아버지 함자를 물어 올 때도 있고, 한발 더 나아가 외가 집 쪽까지 물어올 때도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버들 류, 의령 곽'이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이 나를 헷갈리게 했다. "음, 소리(솔례) 문중이구먼." 생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됐다. 나는 궁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할아버지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면 버릇없는 아이로 보일 것 같아 물을 수가 없었다.
의령에서 소리로, 오랫동안 그렇게 불리던 본이 다시 현풍으로 바뀌었다. 현풍 곽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장가를 들고서다.
대를 이어 나는 곽 씨 문중으로 장가를 들게 됐다. 처가는 외갓집과 멀리 떨어진 포항이었지만 같은 직계 손이고, 성과 본에 대한 자긍심도 외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처가에서는 소리라고 하지 않고 현풍이라 했다. 아마도 '솔례'마을과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지명도가 높은 현풍을 쓰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棺) 위를 덮을 명정(銘旌)에 쓰인 본관은 포산(苞山)이었다.
유년시절 어머니가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아내는 이제 댓살밖에 안된 아이를 앉혀놓고 홍의장군 이야기를 들러줬다. 이야기 형식도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출필곡반필면' 나는 아내가 아이에게 망우당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지난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훌륭한 사람들 중엔 외가 쪽 영향을 받은 이가 적잖다는 말을 듣긴 했었지만 저러다 아이의 근본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 쓴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올곧게 잘 가르치러는 마음도 좋지만 사골 우려먹듯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조상을 들먹이니 돌비석인들 온전할까. 손때에 너덜너덜해진 책표지처럼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빗돌이 눈앞을 스쳐갔다. 산 아래서 마주했던 비석은 망우당 묘와 닮아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석은 망우당의 아버지 정아 무공(定庵公) 각월(郭越)의 원래 신도비였다. 빗돌은 새 비가 건립된 곳에서 저만치 외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비석은 작고 볼품이 없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어 비문은 지워지고, 풍화(風化)로 푸석돌처럼 약해진 비석에는 희뿌연 백화(白花)가 피어 있었다. 손만 닿아도 퍼석 허물어 내릴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비석은 쉬이 내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비석에 핀 흰 꽃이 마치 엄동설한 유리창에 엉긴 서리꽃처럼 보였다. 비석에는 정암(定庵)의 기(氣)가 서려있는 듯했다.
정암은 의주목사 관찰사를 지냈다. 자녀교육에 관심을 많았던 그는 의령 세간천에 용연정을 지어 다섯 아들로 하여금 면학과 함께 활을 쏘게 하며 심신수련에 집념을 보였다. 정암은 동지사로 중국으로 갈 때 셋째 아들인 망우당을 대동하여, 안목을 넓히고 선진문물을 익히게 했다. 그는 1586년 8월 6일 6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605년(선조38년)자현대부 예조판서로 추증됐다. 신도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난 1635년(인조 13년)에 세워졌다.
스승은 제자의 위업으로 인하여 더 빛이 난다. 아버지 곽월의 가르침이 없었으면 어찌 망우당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안내문에 새겨놓은 글귀를 보면 정암의 후손들은 결과보다는 원인을 중시하는 것 같았다.
망우당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수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벼슬을 탐하지 않았다. '쥐가 없으면 더 이상 고양이는 필요치 않다.'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전쟁 중에도 공을 내세우기를 싫어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망우당은 자신의 전공을 알리기 위해 적의 수급(首級)을 원치 않았다.
'의병은 명예나 사익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니 왜적을 격파하는 데만 힘쓰고 죽은 적의 머리를 베어 이를 조정에 바치고 논공행상을 바라지 말라.' 오히려 부하들에게 공명심을 경계케 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왜군을 물리쳐서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백전백승, 망우당의 전술은 병서(兵書)에서 익힌 그의 지략이라 할 수 있겠으나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는 올곧은 정신은 아버지 정암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영화도 국록도 버리고/ 구름 산에 누웠으니/ 세상 근심 다 잊고 몸은 절로 한가롭네/ 고금에 시선이 없었다고 하지 말라/ 다만 내 마음 한 번 깨달음에 있다네.' 조일전쟁이 끝나고 망우당이 초야에 묻혀 살 때 읊은 시다.
노블레스오불리즈,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줄 알았던 망우당, 아들을 바른길로 이끌었던 정암,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이 신도비와 무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유년시절, 철강 홍의 장군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던 어머니의 마음 또한 정암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빗돌에 내려앉은 서리꽃은 서슬 퍼런 정암의 눈빛 같았고, 귓가를 스쳐가는 한줄기 바람은 지난날 내게 밥상머리 교육을 시키시던 어머니의 잔소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