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의 시간 / 이승애

 

 

자료집을 찾으려고 책장을 가리고 있던 소파를 밀어냈다. 오랜 시간 밀봉되었던 책장이 부스스 눈을 뜨는데 뽀얀 먼지가 반기를 들 듯 사방으로 흩날린다. 바닥엔 검은 비닐봉지 하나, 백 원짜리 동전 두어 개, 작은 손걸레, 신문지 몇 장, 약봉지, 검은 고무줄 등 잡동사니들이 먼지와 뒤엉켜 널브러져 있다.

4년 전 이사하면서 갖고 있던 책 중 반 트럭 가까이 나눠주었다. 그런데도 여덟 개의 책장이 부족해 몇 개를 더 사야 했다. 네 개의 책장은 서재에 놓고, 나머지 여덟 개는 거실에 놓기로 했다. 네 개는 한쪽 벽면에 붙여 놓았고, 네 개의 책장은 가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도서관식 형태로 뒷면을 맞붙여 놓아 앞뒤로 꺼내 볼 수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공간이 좁아져 소파를 책장에 바짝 붙여 놓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파와 책장 사이에 묘한 구석이 생겼다. 너무 크고 두꺼워 책장에 꽂기 어려운 사전과 앨범을 이 구석에 놓았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딱 들어맞는다. 사전과 앨범은 고요한 터에 저만의 자리를 차지해 헐렁했던 구석은 틈이 메워져 안정감이 있게 되었다.

오늘 오빠가 와서 자료집을 찾으려 소파를 밀었는데 이 지경이 되어 있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몽땅 드러내고 책들 사이에 낀 먼지를 털고 책장 구석구석 닦아냈다.

문득 요즘 내가 몰린 상황도 이 구석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머니와 오빠, 나 이렇게 세 가족은 세상과 좀 동떨어진 구석으로 들어가 머무는 중이다. 아흔일곱의 어머니의 구부러지고 엉켜버린 뇌의 회로로는 사람들과 융합할 수 없고, 암 투병 중인 오빠는 활개를 치며 활동할 수 없으니 구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상황이니 자의든 타의든 구석 한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차지한 구석이 삶의 늪이 아니요, 불행의 자리도 아니다. 구석이 꼭 패배자들이 숨는 음지의 장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석은 나름대로 나를 보호해주고 많은 것을 선물로 주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쉼 없이 돌아가는 시간의 톱니바퀴에 매달려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시간보다는 타인을 위한 시간에 더 비중을 두는 삶이었기 때문에 늘 목마름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구석이 그리웠다. 구석에 머물게 되면 그동안 듣지 못했던 내면의 소리를 귀 여겨 들을 수도 있고,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월은 내 소원과는 다르게 흘러갔고 오래도록 구석을 차지할 수 없었다.

신의 섭리는 참으로 묘했다. 원할 땐 주시지 않더니 불현듯 허락해준 구석은 아늑함보다는 가시방석이었다. 은밀한 공간의 즐거움은 허황한 꿈이었다. 격리되고 단절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달려 있던 끈들이 뚝뚝 끊어져 나갔다. 우리의 구석은 평온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밀봉된 책장처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는 자리일 뿐이었다. 불안감이 먼지처럼 쌓여가고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 몰려들어와 자리를 어지럽혔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구석은 그런 우리를 어머니의 자궁이 되어 품어주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마를 새 없던 눈물샘도 조금씩 말라갔다. 여전히 고전 중이지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구석의 안온함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구석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나 보다. 낮고 조용한 이곳에선 고통과 슬픔을 애써 참을 필요도 은폐할 필요도 없다. 느끼는 그대로 아파하고 슬퍼하다 보면 그들과 타협하게 되고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다.

채근담에 역경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호걸로 만들기 위해 단련시키고 담금질하는 화로와 망치의 역할을 한다. 그 단련을 받아 이겨내면 몸과 마음이 함께 이롭고, 이겨내지 못하면 심신이 해롭다고 하였다. (橫逆困窮 是煆煉豪傑的一副鐪錘 能受其煆煉 則身心交益 不受其煆煉 則身心交損)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꿋꿋하게 정진하는 중이다.

구석은 결코 서두르거나 채근하는 법이 없다.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기다려줄 줄 아는 미덕을 지녔다.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고 자장가를 부르듯 부드러운 손길로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가지 않은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해 주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힘을 북돋아 준다.

구석이 무조건 호의만 베푸는 것은 아니다. 가끔 현실을 부정하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할라치면 따끔한 회초리를 들어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치기도 한다.

구석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쉼의 자리요, 정화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자리, 잃어버린 희망을 찾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이 구석의 시간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구석에 있으면 경쟁할 필요도,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도 없다. 이곳은 남의 모습보다 내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은밀한 자리에서 마음에 군불을 지피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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