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이 화를 벌컥 낸다.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것인가. 애써 평온한 척했지만 속은 무던히 끓고 있었나 보다. 이번 명절은 복잡한 심사로 차례를 지내러 가지 못했다. 조상에 대해 면목이 없어 마음이 무겁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한 달 전인가. 큰댁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로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조카가 불쑥 내뱉는 말 한마디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인데 오히려 돌팔매질했다니. 억울하다. 대화를 한답시고 섣불리 나서다간 말이 말을 낳고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일 게 뻔하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불만이 비집고 나오려고 했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더구나 아랫사람이 아닌가. 나의 모난 구석 때문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는 뜻인데 언제부터 형님과 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까.
사람의 타고난 성질은 제각각이라 세모나 네모가 아니면 동그라미처럼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실제로 나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과 맞닥뜨리면 그냥 넘기기 쉽지 않다. 남의 집 불구경이란 말은 있어도 제 속의 불은 불이 아니라 지극히 타당하다고 여긴 게 아닐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이건 언제나 상대편을 향해 날리는 잽이다. 무슨 날이 되면 크고 작은 갈등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걸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모처럼 만났으니 좋은 이야기가 오갈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쌓인 불만은 참을성이 없어서 터져 나오는 분노로 모두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뒤척거릴 뿐이다. 어제의 짝과 등을 돌리거나 적이던 사람과 손을 잡고 편을 먹는 정치인의 술수는 웬만해서는 따라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저 둥글둥글한 게 최고라고 여기며 원만하다고 착각하는가.
오늘 TV에서 "다 좋은 세상이 예술이다"라는 방송은 인상적이었다. 세상을 다 좋게 바라본다면 우스갯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아닌 게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시선을 가질 수 있냐고 따질 것이다. 아무리 삶이 아름다워지고 살고 싶은 세상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지만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보통 사람에게는 무리가 가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한참 듣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강연 내용에 빨려 들었다. 내게 좋은 것이 남에게 안 좋을 수도 있고 남에게 안 좋은 것이 내게 좋을 수도 있다면 애초에 좋고 나쁨은 없는 게 아닌가. 벌레가 싫다고 다 없애면 안 되듯이. 다 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 좋다고 여겨보라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 보일 수밖에. 그런 눈으로 내 앞에 나타난 길을 받아들인다면 호기심과 흥미로 날마다 즐거워질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기며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가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하기는 우리들 양자兩者 중 어느 편이 한층 좋은 운명을 만나게 될는지, 그것은 신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내가 삐죽이 내민 모서리를 어루만져 주는 위로의 말이다.
오래전 미혼모가 낳은 쌍둥이 자매 이야기도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로 다른 나라의 양부모에게 입양이 되었다. 다 자란 뒤 유튜브를 통해서 닮은 자매끼리 서로 알아보게 되었고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물보다 진한 피의 정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모를 찾아 나섰다. 막상 전해오는 말은 생모가 그런 딸을 둔 적이 없다고 한다. 낳아준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는데 상처를 입었고 불행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어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아동복지회 직원들과 위탁모들이 서인이 된 그들에게 보여준 사랑에 감동했다. 방송에 출연까지 하면서 태어난 나라를 알게 되었고 생모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세상에는 하찮거나 모난 것과 쓸모없는 것들은 애초에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있는 모양대로 보아주면 모두가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어울려 반짝거리는 게 삶이라고 여기니 마음이 편하다. 가라앉았던 기운이 되살아났고 내게 모서리를 내밀었던 사람들에게 적어도 미움은 가지지 않으리. 좋은 마음으로 이 고비를 넘겨보리라. 내 모서리를 매만져주는 말씀은 사랑하는 눈길을 가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