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강의를 들으셨던 분이 “방송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항상 시청자·대중이 원하는 걸 해야 하니까 힘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만 생각하고 일했으면 금방 한계에 부딪쳤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 중에서 다른 사람도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지,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나도 좋아하는 게 뭘까를 생각해왔으니까요.
방송의 특성 중에 일상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방송은 다수의 공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법한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는 건데요.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나에게 편하고 익숙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죠.
잘 모르기 때문에 글이 길어지고 장황해진다고 했던 얘기, 기억하시나요? 그래서, 처음 글을 쓸 때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제일 자신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내가 손에 잡을 수 있는, 작고 다루기 쉬운 것들로 시작하는 겁니다. 요리로 예를 들어볼게요. 요리가 아직 서툰데, 최고급 소고기 스테이크처럼 비싼 재료에 적정한 온도로 조리해야 하는 어려운 음식을 시도하면 부담도 크고 실패할 확률도 크겠죠. 라면이나 김치볶음밥처럼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 나한테 익숙한 것부터 조금씩 시도해야 성공 확률도 높이고 요리 실력도 쌓일 겁니다.
글쓰기에서도 이런 식으로 나한테 유리한 아이템을 찾으면 쉽고 빠르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지치지 않고 계속 쓰게 만드는 힘도 생기겠죠. 쓰고자 하는 주제도 너무 거창한 것보다는 내가 감당할 만한 범위로 잡는 게 좋습니다. 또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구체적인 것들로 쪼개 단순화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쓰기에 편한 글이 읽는 사람에게도 쉽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세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에 힘이 있습니다.글을 쓸 때 소재와 주제를 혼동한 상태로, 혹은 동일하게 놓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재와 주제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글을 쓰면 중구난방으로 읽는 사람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소재는 글감, 뭔가를 만들기 위한 재료입니다. 완성물이 아니며 사람에게 전해주는 감정,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건 주제죠.
소재도 사랑, 주제도 사랑인 글을 생각해볼까요? 사랑에는 부모 간, 연인 간의 감정 등 다양한 형태가 있을 겁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랑에 대해 쓸 건지, 그 사랑의 어떤 면에 대해 얘기할 건지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고 막막한 상태에서 글을 시작하면 곧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일관성 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다가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마무리도 안 되고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겠죠. 그리고 관념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떠올리는 게 다 다를 수 있다는 점도 글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소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주제는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소재로는 가능하지만, 주제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강하다”, 더 구체적으로는 “어머니의 사랑은 강하다”, 이렇게 명확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한 방향으로 집중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주제가 불분명하면 글의 내용이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제안을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없다면 그 아이디어가 잘못된 것이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제가 글을 쓸 때 항상 가슴에 새기는, 할리우드 제작자 로버트 코스버그의 말입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 전달하려는 바를 스스로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독자들이 이해할 가능성은 더 낮아지겠죠.
주변에 보면 같은 얘기라도 재밌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얘기가 하도 지루하고 장황해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질문을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황하게 말하는 사람은 내 안에서 요점이 뭔지 명확하게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요점만 짧게’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든 글을 쓰든 먼저 이 요점이 뭔지를 정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주제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정하고, 한마디로 요점을 정리해놓는 게 안정적으로 글이 흘러가게 하는 요령입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정리해서 계속 그 목적지를 바라보고 상기시키면서 나아가세요.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한 문장’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주제를 정리해놓은 문장이 모호하거나 장황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연습하고 있는 짧은 문장으로 만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생각을 거듭해서 구체적인 한 문장으로 압축하다 보면 처음엔 모호했던 생각이 선명해지면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잘 다듬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는 한결 수월해집니다.
우리들은 글을 쓸 때보다 말로 할 때 더 쉽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잘 정리가 안 될 때는 입으로 내뱉어보는 게 효과가 있기도 합니다. 친구한테 얘기한다고 생각하고 말을 해보거나, 내 말을 녹음하고 다시 들어보면서 정리하는 것도 좋습니다. 쉽고 짧은 글을 쓰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겠습니다. 하나의 제목을 단 글에 소재는 여러 개일 수 있지만, 주제는 딱 하나여야 한다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방송작가
물리학을 전공한 언론학 석사. 여러 방송사에서 예능부터 다큐까지 다양한 장르의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짧은 글의 힘’, ‘웹 콘텐츠 제작’ 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