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 배귀선

 

 

망초 한 촉, 어디서 떠돌다 왔는지 측백나무 울타리에 터를 잡았다. 초라한 행색이 볼품없어 뽑으려다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그냥 두었다.

햇살에 잎맥 짙어지고 정강이 툭툭 건드리는 바람에 점점 실해져 가는 유월. 이파리가 바람의 중심을 잡는 동안 줄기는 땅속 시간을 길어 올려 허공에 작은 꽃을 수놓는다. 배냇짓처럼 쫑긋거리는 꽃잎 사이로 드나드는 햇살에 점점 또렷해지는 망초. 울타리의 텃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볕을 불러 뜨겁게 산다.

가끔 찾아오는 박새와 속살거리고 우리 집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를 불러 허허로이 살아가는 망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난세의 기인 경허선사가 생각난다.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으나 머리를 기르고 이름까지 바꾼 채 어린이를 가르치다가 입적하였다. 그의 제자 수얼도 깨달은 후 승가에서 불목하니로 살았으니, 깨달은 자의 진정한 삶이란 저 망초처럼 낯선 곳에 숨어들어 겸허를 이루며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얼마 전, 일 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지내던 선배를 만났다. 호형호제로 살아온 시간이 수년인데 언제부턴가 금이 간 관계는 개선될 여지 없이 틈만 더 벌어져 갔다. 닫힌 마음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시시포스처럼 돌덩이를 매달고 살았다.

고통은 같은 질량이라도 사람마다 체감에 따라 다른 것처럼 내가 느끼는 사소한 일이 상대에겐 씻지 못할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더 무서운 것은 내가 평생 힘들게 살아야 하는 멍에를 얹어 줄 수도 있으니 화해는 그러한 고리를 끊는 가장 중요한 행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았기에 다행한 일이었다.

겸허하다는 것은 있고 없음이 일여한 무無의 존재에 가까운 사람일 것인데 무無란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해야 맛을 낼 수 있다. 비우매 은둔을 꿈꾸는 망초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니, 망초를 통한 깨달음이 결국 그 선배에게 전화하게 한 것이다. 머쓱한 화해는 지난 시간에 대해 후회하게도 했지만 사람 귀한 줄을 체득한 것이기에 서로를 다독였다.

낯선 곳, 낮은 곳에 임한 망초. 어쩌면 불교의 마지막 수행은 밥상에서 절을 받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망초처럼 이웃과 어울리는 것일 거다. 볼품없으나 낮은 만큼 넓은 하늘을 품을 수 있고 아래를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망초는 틈과 그늘을 밝히는 경허선사 같은 소박한 꽃이지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좌우명이 하나 있었다. "잘 숨는 사람만이 잘 사는 사람이다."라는 고대 로마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인데, 데카르트 자신도 고국을 떠나 수년을 숨어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은 권력이 지배하는 물질세계 위에 정신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상은 은밀한 곳에서 활동하듯 사람도 삶에 있어 나이가 들수록 저 망초처럼 겸허의 은둔을 잘해야 할 것 같다. 때론 햇볕이 가리고 측백나무 가지에 밀려도 낭창낭창 사는 망초. 오늘, 그가 나의 은둔을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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