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 김희자

 

 

평소보다 곱절이나 걸려 당도한 고향이다. 고향은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층계를 이룬 다랑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향 특유의 흙냄새는 예나 지금이나 오감을 자극한다. 옛 둥지를 찾는 새인 양 마을 길을 들어 낯익은 문패 앞에 섰다.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버선발로 뛰쳐나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다림에 젖어있다.

품에서 흩어졌던 식솔들이 둥지를 틀고 찾아든 고향집이다. 매양 그립던 피붙이들은 정이 곰살갑다. 남편과 나란히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자 그 뒤로 두 딸이 따른다. 쌈지를 나온 세뱃돈에서 곰삭은 사랑과 끈끈한 정이 묻어난다. 마당에는 숯불구이 준비로 분주하다. 지난가을 아궁이에게 구워낸 숯이 화기를 토한다. 숯의 열기는 부모님의 정처럼 뭉근하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찾아들 자식들을 위해 염소고기를 준비해놓았다. 숯이 타오르듯 뜰 안 가득 정담이 피어오른다.

지붕 뒤 상수리나무에는 정초부터 까치들이 부산을 떤다. 까치들의 둥지 틀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까치는 본시 부지런해서 다른 새들은 꿈도 못 꿀 시기에 한 해 살림을 시작한다. 겨울부터 까치가 튼 둥지는 튼튼하다. 부모님이 튼 고향집처럼 인고의 산물이다. 세찬 바람이 둥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도 부서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뭇가지를 대충 얹어 얼기설기 지은 것 같지만 사람의 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치밀한 건축 솜씨이다.

수많은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물어다 부리로 이리 꿰고 저리 엮어 마치 철옹성 같은 둥근 외벽을 만든다. 안쪽에는 부드러운 식물 줄기와 뿌리, 동물 털 등으로 안락한 내부 둥지를 튼다. 까치가 튼실한 둥지를 만들려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이나 걸린다니 자연 서두를 수밖에 없다. 사람이나 날짐승이나 새끼 거두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튼튼하기로 말하자면 고향집도 까치둥지 못지않다. 까치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가 부화하고, 부화한 새끼가 자라서 새로운 둥지를 치듯 어머니는 윗대에서 물려준 둥지를 튼실하게 간수하여 자식들을 오달지게 키워냈다.

양푼에 고기가 바닥날 즈음 기우는 저녁놀이 술잔에 잠긴다. 앞산을 넘은 어둠살이 고향집을 상보처럼 덮는다. 초하루 달이 없는 시린 하늘에는 별만 은은하고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소리에 놀란 문풍지가 부르르 떤다. 밤이 이슥해서야 노는 것에 지친 아이들이 잠자리를 편다. 자그마한 집은 아니건만 방마다 만원이다. 피붙이들에게 안방을 내어 주고 어머니는 부엌방에서 자겠다고 몸을 일으킨다. 가장 낡은 이불 한 채를 챙겨 부엌방으로 드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니 큰 딸도 내 꽁무니에 붙는다. 잠자리로 쓰지 않는 방이라 훈기가 없다고 말리지만 나와 딸은 어머니 옆에 나란히 누웠다.

평안한 고향집에 누우니 다사로운 정이 되살아난다. 까슬까슬한 이불에서 어머니의 부지런함이 배어난다. 정월 초이틀에 태어난 어머니는 태생적으로 부지런해 까치에 버금간다. 계집애가 연초에 태어나서 애哀 가 많다는 말을 종종 하셨다. 주어진 삶이 분주하여 자주 오지 못하지만 설날만은 고향을 찾는다. 다음 날이 어머니의 생신이기 때문이다. 일 년 만에 찾은 친정이라 잠자는 시간조차 아깝다. 어머니 허리에 바짝 붙은 내가 입을 연다.

"삼대가 나란히 누웠네!"

내 말 속에 숨은 뜻을 눈치챈 어머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옆에 누운 딸도 반웃음을 친다. 어머니는 객지 생활은 어떠냐며 손녀에게 넌지시 묻는다. 안부 전화를 넣을 때마다 객지에서 생활하는 손녀 걱정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당신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자식 걱정, 손자 걱정이다.

삼대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날이 또 올까. 우리가 누운 방은 예전의 부엌을 개조한 곳이다. 둥지 않에 살았던 식솔들의 끼니는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부뚜막에 걸려있던 가마솥에는 꽁보리밥이 늘 한 솥 가득이었고 그 옆 작은 솥에는 된장을 푼 국이 어머니의 눈물처럼 넘쳤다. 푸슬푸슬한 보리밥이 뜸을 재울 때까지 불땀을 조절하던 어머니는 머릿수건 고쳐 쓸 틈조차 없었다. 넉넉한 둥지는 아니었지만 육 남매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눈물어린 희생 속에서 오지게 자라 하나 둘 대처로 떠났다.

새벽녘 선잠에 들었다가 천장에서 달음질을 하는 쥐 소리에 잠을 깼다. 늙은 벽시계의 종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고향집은 어머니가 열일곱 살에 시집을 와서 육십 년을 넘게 살았던 아늑한 집이다. 천장에서 달음질을 하는 생쥐들도 몇 대는 이어졌을 터이다. 어머니의 고단했던 젊은 날과 노년의 평온함이 고스란히 녹아든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옹다옹하며 삶의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고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가 굽은 어머니의 터전이기도 하다. 소나무 껍질보다 거칠어진 손으로 지금도 보살피고 지키는 보금자리다.

되돌아보면 내가 튼 둥지가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탐욕에 눈이 먼 자의 꾐에 넘어가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을 뻔했다. 세상 물정에 캄캄하여 둥지 밖 세상에는 묽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들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둥지처럼 위태위태하게 살았다. 질곡의 삶 속에서도 둥지를 지켜낸 어머니를 생각하며 거친 세파를 견뎌냈다. 지난한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간 후에야 하찮은 일들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물질보다 가족의 안녕이 우선이고 같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좋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둥지에는 머무름과 떠남의 욕망이 존재한다. 둥지 속에 머물 때는 날고 싶은 꿈을 꾼다. 정든 품을 떠나 또 다른 세상을 날아보니 아늑한 둥지가 그립고 제자리를 지키는 어머니가 우러러 보인다. 어머니의 품에 파고들었다가 딸의 다리 사이에도 발을 쑤셔 넣는다. 뇌경색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지만 꿋꿋하게 일어섰던 어머니이다. 그런 피를 대물림 받아 끈기 있게 나아가는 딸을 보면 감사하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아버지는 빨래도 하고 소일거리를 거든다. 어머니는 노환으로 청력을 잃은 아버지의 귀가 대신 되어준다. 두 분은 서로 등을 기대 비비기도 하고 보듬으며 살아간다. 이제는 어느 한 분의 자리만 비어도 적적함이 묻어날 둥지이다.

누구 할 것 없이 길을 떠났다 돌아올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다면 복이 아니런가. 품을 떠나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두 딸에게 내가 튼 둥지는 어떻게 기억될까? 녹록하지 못한 탓에 안온한 둥지는 되지 못했지만 비상을 한 새가 아늑한 옛 둥지를 그리워하듯 내 아이들도 언제든 돌아오면 평온한 품이기를 소망한다. 이대로 고향에 머물고 싶지만 동이 트면 내가 친 둥지로 돌아가야 한다. 두 딸이 온전한 날개를 달아 창공으로 날아오르면 옛 둥지로 돌아오고 싶다. 밤하늘 북두칠성이 선하고 해조곡이 아름다운 옛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나의 마지막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