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앞 횡단보도 / 심선경

 

 

경찰서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선명하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초록색이고 내 차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정지선 앞에 서 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건너갔는데, 검정비닐 봉지를 든 할머니가, 애 터지게 느린 걸음으로 도로를 횡단하고 있다. 할머니의 보폭으로는 분명 걷는 것일 텐데, 내 눈에는 그냥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다.

 

언뜻 보아도 구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남루한 차림에 허리가 몹시도 굽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는다. 세상이 정해 놓은 법 같은 것은 이미 초탈超脫하였다는 듯 무법자가 따로 없다. 첨단의 시계로 측정하거나 보편적인 상식의 잣대로 가늠할 수 없는 영역에 할머니는 존재하는 것일까. 저 횡단보도가 할머니에겐 흑색과 백색을 교대로 그려 넣은 계단같이, 높낮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한걸음 뗄 때마다 높은 턱에 덜커덕덜커덕 발이 걸리는 듯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횡단보도를 제 시간대에 못 건널 것을 알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는지 모른다. 오래 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는데, 경고음을 울리며 어르신에게 빨리 건너가시라고 재촉하는 것은 너무 야박하고 무례한 처사가 아닌가.

 

횡단보도의 흑백 교차 무늬를 보니, 얼마 전 동물원에서 탈출해 서울 도심을 발칵 뒤집어 놓은 얼룩말 '세로'가 떠오른다. '세로'는 어린이대공원 동물원 울타리를 부수고 나와 도로를 질주하고, 서울 도심 곳곳을 활보하다 마취총 7발을 맞고 생포됐다. 두 살배기 세로는 최근 부모를 여의며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한다. 사육사는 '세로'가 의도적으로 탈출을 모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소리에 놀라 우발적으로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광활한 사바나에서 집단을 이뤄 살아가며, 사회성이 고도로 발달한 동물인 얼룩말이 좁은 우리에 갇혀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렇다고 이제껏 먹이를 주며 사육한 동물들을 야생 적응 훈련이나 준비기간도 없이 무작정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생태계의 상위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동물원을 없애고 전시 동물들에게 돌아갈 자연을 온전히 돌려주기는 어렵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동물원은 멸종위기종의 보전과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동물들을 보호하고 재활을 돕는 시설로 바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들일지라도 인간이 그들을 가두어놓고 학대할 권리는 없다.

 

횡단보도가 마치 얼룩말 가죽을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는 한발 한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뎌 얼룩말이 벗어놓은 가죽을 밟고 간다. 얼룩말 무늬를 닮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아픈 다리를 잊고, 아프리카 대자연의 푸른 초원에 사는 얼룩말처럼 맘껏 달려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풀어놓고 싶은 비밀도,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도 할머니의 꽉 다문 입속에 엄폐되어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살아온 삶에도 애환과 고통은 많았을 터, 그 이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온 듯 축 처진 할머니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땅바닥으로 내려앉을 것만 같다. 착시일까. 횡단보도가 얼룩말의 무늬처럼 조금씩 일렁인다. 일렁이는 얼룩말 무늬에 겹쳐지는 그녀의 깊은 주름을 펼쳐놓으면, 지난한 한 생애가 마구 쏟아져 나올 듯하다.

 

할머니가 횡단보도를 절반도 못 건넜는데, 맞은편 신호등의 초록 막대가 계속 떨어지더니 결국 빨간불로 바뀌었다. 신호가 바뀌자, 몇 초전에 할머니가 발걸음을 옮겼던 쪽으로 차 한 대가 '쌩'하고 지나갔다. 머리끝이 쭈뼛 선다. 아직 횡단보도에 서 있는 할머니를 지켜보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속이 타들어 간다. 고작 길을 건너는 사소한 일상에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 횡단보도에 기적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날아온 슈퍼맨이 재빨리 할머니를 둘러업었다. 헬멧을 쓴 히어로는 신속한 동작으로 위험한 횡단보도에 갇힌 할머니를 구출해 냈다. 신호등이 바뀐 지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정지선에 그대로 멈춰 서 있던 운전자와 도로변을 걷던 사람들이 숨죽여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배달기사의 도움으로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할머니가 안전한 곳에 착지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우리 시대의 영웅에게 함박꽃 같은 미소와 박수를 보낸다. 그는 헬멧을 고쳐 쓰고 잠시 도로에 세워 두었던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황급히 사라졌다. 할머니는 횡단보도를 건너와서도 바로 걷지 못하고 허리를 애써 세우며 잠시 숨을 골랐다. 아직도 할머니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검정비닐 봉지를 한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노인은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 복잡하고 고된 세상에서 70년, 80년, 90년을 넘게 살아남은 노인들이 우러러 보이기까지 한다.

 

경찰서 앞 횡단보도를, 오늘은 내가 보행자가 되어 신호를 기다린다. 그 할머니는 최종목적지에 무사히 당도하셨을까. 유모차 보행기를 밀고 나온 다른 할머니 옆에 서서 보폭을 맞춰 길을 함께 건넌다. 조금 늦더라도 이번엔 내가 할머니를 무사히 길 건너편까지 모셔다드려야겠다는 생각이다. 아직 갈 길이 남았는데, 이윽고 신호등의 녹색 신호가 두세 개만 남았다. 맘이 바빠지고 불안해진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져 결국엔 유모차 보행기를 내가 밀며 할머니를 재촉하고 있다.

 

문득 횡단보도의 도색이 어릴 적 교실 앞 한쪽에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풍금의 건반 같아 보인다. 풍금은 발로 페달을 밟아 바람을 불어넣어 연주한다고 풍금風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풍금 소리가 멈춘 지가 오래되어 지금은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풍금 소리는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내 유년의 기억과 맞닿아 있다.

 

국민학교때 교실 청소를 마치면 풍금 뚜껑을 열고 아무 건반이나 신나게 누르며 장난을 치다가 선생님께 들켜 된통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건반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신기해서 자꾸만 손가락이 갔다. 풍금은 피아노보다 맑고 깨끗한 음색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울림은 행복감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밟고 지나가면 '과수원길', '반달', '엄마야 누나야' 같은 동요가 사방에 울려 퍼질 것만 같다.

 

슈퍼맨의 등에 업히기 전, 횡단보도를 밟은 할머니의 고단한 발이 연주했던 풍금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경쾌한 소리가 나지 않았었다. 불편한 발로는 바람을 제대로 불어넣을 수 없어서였을까. 내 귓가엔 풍금의 웅숭깊은 소리 대신, 뭔가 삐꺽대는 소리만 더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겪어 온 세월만큼, 그토록 오랜 시간을 웅크리고 있던 한 세기말의 슬픔은 언제쯤에나 제대로 조율되어 울림이 크고 둥근 풍금소리가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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