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개화 不時開花 / 김이경

 

가을 하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다. 서너 알 대롱거리는 산수유 열매는 파란 물속에 잠긴 새빨간 보석이다. 스마트폰이라는 마법의 기계가 하늘 속에 땅을 담는다. 빨강과 파랑의 대비가 눈이 시리도록 곱다.

저토록 파란 하늘에 담기기 위해 빨간 열매들은 이 늦은 가을까지 나뭇가지에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탱탱해 보이던 열매들이 줌인 한 화면에서 쪼글쪼글해진다. 나도 모르게 줌아웃했지만, 보이지 않던 흉터 같은 주름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위태롭게 매달린 저 빨간 열매는 언제까지 저 모습을 지켜낼 수 있을까?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처럼 흔들리는 시간은 언제까지일까. 바람이 좀 더 차가워지면 파란 물감을 단단히 쥐고 있던 손이 조금씩 느슨해질 것이다. 잿빛으로 변해가는 하늘 아래서, 떨며 빛바래고 이지러질 열매들을 생각하니 빛깔 고운 사진까지 안쓰럽다.

몇 장의 사진을 넘기는데 사진 가장자리에 잡힌 붉은색이 눈에 들어왔다. 휘휘 둘러보니 산수유나무가 서 있는 언덕 아래 떨기나무들이 붉게 물들어있다. 가까이 가 보았다. 단풍 든 잎을 모두 떨어뜨린 헐벗은 떨기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 마른 가지에 산호처럼 빛나는 낙상홍이 도드라졌다. 서리를 맞으면 더욱 붉어진다는 낙상홍落霜紅. 그 곁에는 가을을 붉게 태우던 화살나무가 조금은 지친 듯 자잘한 붉은 구슬을 휘감고 있었다. 그토록 붉게 가을을 태우고도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것은 낙상홍에 지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그 가운데 철쭉 한 그루가 붉은 열매를 시샘이라도 한 듯 무더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 떨구지 못한 마른 잎 사이로 드문드문 푸른 이파리도 보였다. 낙상홍과 화살나무 열매 옆에 핀 철쭉이라니. 12월이 코앞이다. 계절이 거꾸로 가는 것인지 철을 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반가운 마음보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언제부턴지 가을 끝자락에 피는 봄꽃을 더러 보았다. 마른 잔디밭에 오도카니 핀 민들레도 있었고, 마른 가지에서 새치름하게 떨고 있던 노란 개나리도 있었다. 동지 무렵 맺힌 목련 봉오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꽃 무더기를 보기는 처음이다. 정말 지구가 앓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니 가을바람이 유난히 추웠다.

지구의 자연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 한다. 날씨도 종잡을 수 없고, 기온도 종잡을 수 없고, 물은 부족해지고…. 이변이라고 하는데 계속되는 이변은 이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새로운 질서다. 그 질서가 막다른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어쩌자는 것일까? 그렇지만 걱정한다고 내게 무슨 수가 있을 리 없다. 대책도 없는데 때아닌 꽃은 아름답기만 했다.

가을 속 봄을 카메라에 담았다. 활짝 핀 철쭉을 가운데 두고 화살나무와 낙상홍의 빨간 열매, 대롱거리는 산수유 열매까지 함께 담고 보니 사진 속에서 불협화음이 요란했다. 홑잎 나물이나 낙상홍 분홍 별꽃이 함께해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마른 잔디에 앉아서 철모르는 꽃을 보며 세상 근심 다 짊어진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알함브라 궁전의 청금석을 펼쳐놓은 듯 파랗기만 했다. 이 고운 꽃을 앞에 두고 이 작은 공원에서 혼자 지구의 근심을 다 짊어진 듯한 내가 좀 우스웠다.

서로 어우러지는 붉은빛이 곱다. 산수유와 화살나무의 붉은빛이 철쭉의 분홍을 밀어내지 않는다. 불협화음은 내 머릿속에 각인된 고정관념일 뿐, 이 가을에 철없이 꽃을 피운 나무 한 그루가 무슨 죄일까. 오히려 변해버린 환경 때문에 겨울잠에 들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이나 아닐는지. 잠결에도 단장한 고운 얼굴을 내민 것이 오히려 기특하다고 해야겠다.

꼭 초록 어린순이나 연분홍 꽃이라야 할 것은 아니다. 탱탱해 보이는 산수유 열매도 가까이 보면 이미 쪼글쪼글하다. 찬바람에 부대끼고 서 있는 산수유나, 까치밥으로 나뭇가지에 남아 서리맞는 붉은 감이나 철을 잊은 것은 마찬가지다. 왼통 지지고 볶으며 떠들썩한 가운데 자지 않고 일어났다고 나무라는 내가 잘못이다.

문득 마른 잎과 섞인 푸른 잎이 내 머리 같았다. 부지런히 염색해도 그보다 더 부지런히도 자라나는 흰머리. 그 흰머리가 어느 날 검은 머리로 자란다면 나는 얼마나 환호할까. 철모르는 나무 한 그루가 피워낸 가을꽃은 어쩌면 철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철을 이겨내는 용기는 아니었을까. 그래, 용기!

꽃이 필 때가 아닌 때 피는 것을 불시개화라고 한다. 이상 발육 현상이다. 그런데 이 가을,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도 내 나이를 잊는 철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철없는 말을 하고 싶다. 백세 시대에는 아직 가을이 아니라는 억지스러운 핑계도 대고 싶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쪼글쪼글해져 매달린 열매가 아닌, 저 떨기나무처럼 철없이 흐드러진 꽃을 한번 피우고 싶다. 그 또한 장수 시대에 벌어지는 이상 발육이라고 슬그머니 눙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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