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레이 김옹 / 김삼진

 

어쩌다가 불쑥 떠오르는 어렸을 때의 별명이 있다. ‘느레이’다. 이 단어가 사전에 는 함경도지방에서 잠꾸러기를 일컫는 방언이라고 나오지만 즉흥적인 어감만으로는 ‘느린 놈’이란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 말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를 호칭했던 단어로 사용되었다. ‘빠른 놈’의 반대 개념인 ‘느린 놈’이라는 뜻으로 썼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별명의 유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의 운동회에서 비롯됐다. 당시에 초등학교 운동회는 온 동네의 잔치였다. 나는 운동회에 달리기 선수로 차출되어 출발선에서 옆에 친구가 하는 대로 달리기 직전의 폼을 어설프게 잡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당시에 나는 좀 많이 띨띨했던 것 같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다만) 앞줄에서 “우리 삼진이 어딨어? 안 보여” 이런 이모들의 속삭임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무료한 표정으로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출발신호소리를 감지하고 달린 것이 아니라 옆에 친구가 갑자기 튀어나오고, 앞줄에 이모들이 “이 녀석아! 빨리 뛰어”라는 재촉 때문에 비로소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기의 목적이 다른 사람을 앞질러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잠깐 사이에 까맣게 멀어져 가는 친구들 뒤를 바라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이모들을 뒤돌아보았다. 외할머니와 이모들은 모두 일어서서 “뛰어뛰어”라고 소리 지르며 미친 사람들처럼 손짓을 해댔다. 그런 열광적 응원이 무색하게도 나는 느긋하게 꼴찌로 걸어서 들어왔다. 이날 이후 나의 아칭 ‘삼지’(삼을 조금 길게 발음했었다) 대신에 ‘느레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엔 아주 오랫동안 별명이라는 것이 내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내게 별명을 붙여줄만한 어떤 명분도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실에 함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내게 무슨 별명을 어떻게 붙인단 말인가.

그리고는 칠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운동회 때 뛰었던 달리기 속도보다는 빠르게 흘렀던 것 같다.

6, 7년 전에 무슨 행사가 있어서 가까이 사는 사람들과 한 차에 타고 행사장에 간 일이 있다. 차안에서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일행 중에 원로 맹난자 선생님께서 내가 중간에서 툭 툭 던지는 객쩍은 소리를 듣고는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셨는지 ‘아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 아마 작고, 똘똘하다는 의미로 지어주셨으리라. 작은 것은 맞지만 똘똘한 것과는 거리가 전혀 멀었음에도 그리 보셨나보다.

‘아톰’? 칠십을 바라보는 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지만 젊어 보인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문단에서 고명하신 맹 선생님이 지어주셨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멋진 별명은 인구에 회자되지 못했다. 별명이란 여러 사람이 자꾸 불러줘야 널리 퍼지는 것인데 지어줄 당시 동승자가 넷밖에 안 되었고 그들과 만날 기회도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파급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별명이 ‘아톰’이니 많은 애용을 바란다며 내 입으로 홍보하는 것도 점잖지 못한 일이었다.

그즈음에 마음 맞는 작가끼리 ‘문달방’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작품 이야기도 나누고 가끔 술도 한잔씩 하곤 했다. 문달방의 회원 수는 50대의 여성이 다섯, 70대의 남성인 나 하나, 모두 여섯 명이 모여 글을 쓰고 합평을 하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다. 나름 신예작가들의 그 모임에 늙다리 영감인 나를 끼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 모임에는 스스로 ‘별명의 달인’이라는 홍정현 작가가 있는데 그는 모임의 균형을 흩트리고 있는 나를 ‘김옹’이라고 부르면 어떠냐며 회원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맹난자 선생님이 지어주신 ‘아톰’이라는 별명이 있으니 그것을 애용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과욕을 부리는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만장일치로 ‘김옹’이 통과되어버렸다. ‘김옹’이란 쉽게 말해 ‘김씨 할아버지’다.

‘김옹?’, ‘옹’하면 어감상 이빨이 빠져 볼이 홀쭉해진 노인네가 떠올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그게 6년 전의 일이다.

6년이라는 세월은 나를 더욱 ‘옹’스럽게 만들었다. 재밌는 것은 세월이 ‘옹’을 좋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저명한 문인 셰익스피어를 사옹沙翁이라하고, 톨스토이는 두옹杜翁이라 한다. 또 나폴레옹은 나옹奈翁이라고 한다. 첫음절을 원어에 맞게 음역하여 비슷한 발음이 되는 글자를 고른 다음 옹을 붙여주는 식이다. 사전에까지 올라 있다. 아무에게나 옹을 붙여주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옹’에는 경칭敬稱의 개념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이란 수필집을 쓴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호가 역옹櫟翁이다. 그런가 하면 불후의 선시禪詩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잡고 티 없이 살라하네./ …… /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를 지은 고려 말의 고승, 아혜근牙慧勤(1320~1371)의 법명이 저 유명한 나옹화상懶翁和尙 아니던가.

나옹의 시를 읊조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유로워지고, 또 너그러워진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갈 수만 있다면 젊은 캐릭터, ‘아톰’이면 어떻고, 늙은 캐릭터 ‘김옹’이면 어떠랴. 빠르면 어떻고 늦으면 또 어떠랴. 빠르고 늦는 것은 어차피 내가 느끼기 나름 아닌가.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는 ‘느레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그렇게 불러주는 바람에 삶을 아등바등 애쓰지 않고 여유 부리며 살았던 건 아닌가 하고. 혹시라도 사람들이 늦게까지 사는 것을 부러워해준다면 ‘김옹’ 앞에 ‘느레이’를 붙여서 ‘느레이 김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러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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