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사람들이랑 겨우 가을산 자투리 붙잡았다. 남하한 단풍이 벌써 지리산을 지나 남도의 끝자락까지 기습한 만큼 마음은 하루가 머다 하고 종종걸음을 친다. 그렇게 간신히 붙잡은 산행 지는 우리 고장의 자굴산이다. 정확히 말해 자굴산 둘레길. 정상을 바라지 않고 높낮이를 평준화하며 걷는다는 다정함이 둘레의 이미지이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안일함에 갇혀 오히려 멀리 지내다, 무엇에든 시들해야 그래도 믿고 맡기는 마지막 보루. 그런 부모 같은 산이 제 고장의 산이리라.
전국구에 이름을 걸만한 명산은 아직 아니지만, 전국에 널린 산행인파에 의해 조금은 새로운 산으로 투척해보라 권하기 좋은 산 이름. 자굴산(897m)은 한우산 억새와 함께 고장의 산이 얼마나 푸근한지를 말해준다.
산의 80%가 무르익어야 가을산이 절정이라더니... 익을 만큼 익어 손대면 툭 벗겨지는 낙엽까지.. 마이너스 10, 20, 30...그 날들을 어떻게 견딜까, 조급해지는 즈음이 딱 요즘 같은 나날이다. 가을은 하루가 서글플 만큼 빨리 저를 닫고 있는데 다들, 나처럼 굼뜨지 말기를...
우리가 택한 시작점은 자굴산 쇠목재이다. 쇠목재에서 오르막 시작하고 돌아보았을 때 탁 트이는 그곳에서 언제나처럼 바람 한 입 흡입한다. 구름에 걸터앉은 산봉우리가 어여뻐서 무심히 지나치지 아니한다.
회원들은 병약하고 뒤뚱대고 허약한 약골들의 집합체이다. 산에 드는 것이 일대종사처럼 여겨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맨 뒤에 두고 가면 어김없이 신경 쓰이는 이가 있다. 참여 숫자가 적어 절반의 흥분을 삭히고 들었던 나에게 그나마 이 분들의 숫자는 얼마나 감읍할 일인지. 이제는 체력에 자신할 일이 아닌 사람들이 그나마 가을이라야 겨우 단풍에 생각이 미친다는 듯 산에 드니, 적어도 문학 산행의 표제에는 충실한 일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래서 다른 산악회의 수준에 비하면 '불량산악회'이거나 '부실산악회'쯤 된다.
야호님의 숨소리는 헉헉이 아니라 케엑- 켁이었다. 나를 웃겨주려 무척 배려한 거친 숨소리. 이런 분들에게는 어떡하든 살을 빼라 할 것이 아니라, 이런 곳에 올라줘서 어찌나 감사한지, 여야 할 것이다.
전망대는 쉼터이다. 쉬엄쉬엄 오르고도 전망대 나타나면 굳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다. 10시 출발도 느지막했지만 부실산악회가 그렇지, 온갖 이유들로 11시 즈음에 결국 산에 들었는데 겨우 40분 걸었을까. 약해 빠진 슬비 언니의 절규인지라 거절할 수도 없다. 저 먹는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마도 흘릴 것만 같다는 예감만... 쉴 자리 나타나면 가장 좋아라 하는 사람은 야호님이다. 움직임이 귀찮아 살로 승화시킨 것인지 살이 부풀다보니 움직임이 둔화된 것인지, 의문부호가 부풀어 오르듯 야호님의 복부는 언제나 궁금증으로 부풀어 있다. 들꽃님이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줄기를 노골적으로 배에다 그려본다. 불룩하게 솟은 곳이 지리산 즈음 된단다. 세상에서 가장 참담하게 인정해야 하는 배부른 자의 현실 한토막을 웃음으로 거든다. 탁 트인 시야에 들어앉는 가을 산이랑 적당히 배경을 그리는 하늘 한 자락이 그림 같아서이다.
든든한 산의 강보에 안긴 가례면의 삶도 평화를 전시한다. 단풍의 꽃빛을 유심히 바라보면 저 홀로 붉어 화홍을 다투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갈빛 적당히 수놓인 것들은 저마다 조금은 시들었거나 노랗게 저무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묘하게 어울려 붉지도 노랗지도 않은 밀감 빛으로 수를 놓는 것이 가을 산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이라며 은근히 자랑했다. 나이 드는 것이 물드는 일이라는 듯....
도대체 가을 산의 화려함을 채색하는 주범들의 실체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빨강일 줄 알았던 엊그제까지의 빨강들이 생의 잔주름들을 액면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나무 하나에도 마치 순리가 깃들었다는 듯 차례차례 늙어가고 있다. 시들지 않은 빨강, 그저 곱기만 한 노랑을 단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이 주름과 저 빛깔들이 매달렸던 나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현명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저를 맡길 것이다. 이내 지혜에 몸을 비울 궁리를 하는 듯 한 단풍이다. 생의 자연현상을 담담하게 수긍하게 하는 이맘 즈음이다.
참여한 회원의 숫자가 적은 것이 처음엔 허전했으나 가만 보니 그마저도 여백 같다. 누군가는 쉼에서 구름과자를 피워 올리고 누군가는 진짜 구름을 바라본다. 반면에 구름은 이렇게 우리를 바라본다. 하늘을 찢어 빼꼼히 내다보는 것으로.
마지막 푸름을 머금은 '용담'이란 아이도 발견했다. 저를 보아달라고 바랜 낙엽 속에서 애원하듯 앉아 있다. 갈참나무인지 졸참나무인지 떡갈나무인지 신갈나무인지, 참나무는 산마다 바스락 깔렸다. 지천에 상수리나무인지 굴참나무인지, 산천에 참나무 없으면 산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깔렸다. 인간의 산하를 풍요롭게 키우고, 인간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다, 겨울이면 산속의 아기들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그 덕분에 스스로 번식하는 나무이다. 그러나 해마다 포기한다. 도토리 키 재기 식 저 다양한 이름들 말이다. 그저 가을 산으로 알록달록, 사람이 섞이러 들어간다.
각자가 차려온 도시락 먹는 시간엔, 저걸 다 먹는다는 놀라움이 튀어나올 만큼 산의 맛은 자랑스럽다. 세간에선 제법 깐깐하다고 한 가닥 잣대로 군림하던 사람의 혀도 산에서는 소용이 없다. 오른 이상 내려가게 되어있는 산의 진리가 숨어서 입맛까지 무난하게 길들여주는 덕분이다. 다 맛있어서 먹게 되어 있다. 거스름이 없으니 거드름을 떨 필요가 없어진다.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붉은 가을 만나니 절약하는 기분까지 든다. 세 시간 걸린다고 하면 네 시간으로 늘여야 한다는 것이 산 아래에서의 계획이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의 계획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간은 사용자에 따라서 제 용량을 만들어간다.
다시 쇠목재로 원점회귀하려 할 때 마지막 단풍 길을 만나게 된다. 계단도 붉고 나무도 붉어 내 탄성도 붉어지는 곳이다. 꼭 쥐었던 서로의 손을 풀어주며 가을이 눈앞에서 떨어지는 곳에 이르면 누구나 잠시 사색하기에 좋을 것이다. 그 날개옷이 떨어지는 장면은 그저 순간이지 않아 찰나의 머무름을 가졌다. 어쩌면 박자이고 그 나름의 쉼이었을 한 생. 마침내 땅에 닿고 사람들 발길에 시적 운율로 깔리는 다함.
낙엽 밟는 소리에서 우리의 청각이 얻은 것은 낙엽이 방금까지 담았던 노랫소리일지 모른다. 시인일수록 더 고마운 가을이라는 한 생이 이렇게 얼마간 머무를 것이다. 그 머무름이란 사실은 순간이다.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