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 김영희
고뿔에 걸리신 어머님이 자리보전을 하고 누우셨다. 입천장이 까끌해 도통 음식 맛을 모르겠다더니 무심코 콩나물갱죽이 먹고 싶단다. 멸치 육수를 우려서 콩나물을 한 주먹 얹으니 말간 국물에서 지난날이 떠올려진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살림이 어려워 죽을 자주 끓여 먹었다. 겨울 낮이면 밥상 위에 죽이 흔하게도 올라왔다. 쌀이 부족하여 갖가지 나물을 넣은 잡탕 죽이었다. 그래도 형제들은 한 국자씩 퍼 담아 게 눈 감추듯 먹고는 더 먹으려 냄비에 코를 박았다. 후후 불어가며 뚝딱 먹고 나면 포만감이 밀려왔다.
엄마는 자주 죽을 내놓는 것이 안쓰러워 우리를 보고 부드러워 잘 넘어가며 소화도 잘 된다고 했지만 쌀독을 열어보면 이유가 있었다. 그러기에 어린 시절의 가난은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심신이 지치고 힘들 때 을씨년스럽게 기억의 한 모퉁이에서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떠올랐다.
첫째 아이를 낳고 오래지 않아 또다시 둘째 아이가 들어섰다. 임신으로 힘든 상황에서 밤낮이 바뀌어버린 첫아이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낮에는 학원에서 학생들과 씨름하고, 밤에는 아이 때문에 지쳤다. 가뜩이나 마른 얼굴이 더 야위었다고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몸에 무리가 갔는지 하루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랫배가 당겼다. 아래에서 피가 흘러나와 속옷을 흥건하게 적셨다. 놀란 가슴을 움켜잡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뱃속의 아기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몸과 마음에 구멍이 뚫려 숭숭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거울을 마주하니 생경스러운 이방인이 광대등걸처럼 서 있었다.
며칠 동안 깊고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먹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설움이 울컥 솟구칠 뿐이었다. 그때 뜨끈한 갱죽이 먹고 싶었다. 어릴 적 찬 밥에 묵은 김치, 그리고 밀가루 수제비를 몇 점 넣고 콩나물을 얹은 갱죽이 생각났다. 제 몸을 풀어헤친 죽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니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퍼졌다. 너울이 지나간 몸에 죽 한 그릇을 싹 비워내니 속은 물론 마음까지 푸근했다. 숨을 곳이 없었던 현실에 죽을 삼키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죽은 심신이 허약해진 몸을 일으켜 주기도 했었지만 신경이 곤두선 팍팍한 마음까지 녹여주었다.
죽은 옛날부터 아프고 배고픈 사람들과 친숙했다. 서민들에게는 한 끼의 식사로 양반들에게는 아리고 지친 속을 달래주었던 음식이었다.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 하던 시절 조상들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죽을 쑤어 먹었다고 하니 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것이다. 적은 양의 쌀을 가지고 많은 식구들이 배고픈 시절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궁핍했던 시절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한때의 끼니였던 것이다. 어떤 먹을거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죽을 보며 받아들이고 감싸 안아주는 푸근한 옛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죽은 소담한 그릇과 잘 어울리며 보기에도 화려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다. 밥보다 물기가 많은 죽은 엄마의 젖가슴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너그럽다. 입안에 넣었을 때 착 감기는 감촉이 좋아 한동안 삼키지 않고 우물거려 본다. 우리는 태어나 엄마 젖을 물리고 나면 갓난아기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먹는 양식이 죽이다. 노환이나 병환으로 이생의 촛불이 사위어 갈 때도 죽은 언제나 곁을 함께 한다. 이처럼 생의 처음과 마무리를 함께해 주는 고마운 음식인 것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죽이 자신을 허무는 것처럼 내 안으로 세운 성벽을 조금씩 허무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칼날이 세월이 주는 시련에 깎이고 다듬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둥글어 짐을 느끼는 것도 죽을 통해서이다. 빠르게 살아야 하는 경쟁 사회에서 때로는 천천히 살아도 마음이 편하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도 죽을 목으로 넘기며 깨달았다. 나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친구의 너그러운 배려에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낀다. 그런 친구가 다독여주던 말들이 가슴에 크게 자리매김하며 언제나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죽을 옆에 두며 알았다.
죽의 다양성을 배우고 싶다. 누구에게나 친근히 다가갈 수 있는 죽처럼. 기쁠 때보다 위로받고 싶을 때 속을 든든히 지켜주는 한 그릇의 죽이 되고 싶다. 죽은 끓일 때 옆에 서서 쉼 없이 주걱으로 잘 저어주는 정성이 필요하다. 모든 음식이 그렇듯 가족을 향한 마음이 담겨있을 때 더 맛이 난다. 진심이 담긴 죽 한 그릇을 물김치와 함께 내밀면 힘든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줄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죽이 뽀글뽀글 끓고 있다. 이 죽으로 어머님이 몸살을 툴툴 털어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위안을 받을 것이다. 그릇에 담긴 죽에는 김치, 콩나물, 쌀이 꼿꼿한 날을 허물어뜨린 채 서로 엉겨있다. 풀어져 눅진해진 모습이 지난날 서릿발 같았던 어머님의 모습과는 대비된다. 이 한 그릇의 죽으로 어머님의 풀기 빠진 모습에 생기를 넣어 해맑게 웃으시며 힘차게 일어섰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