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뒷모습 / 김영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막 나서려는데 무엇인가 휙 스치더니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파트 출구로 향하는 벽에 막혀 뚜렷하지는 않지만 분명 눈뿐만 아니라 가슴에도 스쳤다.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나선다. 사는 게 궁금해 친정아버지가 오셨다 되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급했다. 저만치 앞에 허연 머리에 등이 살짝 굽은 할아버지 한 분이 느린 걸음을 재촉하신다. 반가움에 달려가려던 마음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킨다.

이층에 사시는 교수님이었다. 이층이라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시기에 가끔 뜰에서 마주치곤 한다. 그럴 때면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신다. 늘 등에는 테니스라켓이 든 가방을 짊어지셨는데 얼마 전부터는 빈 몸이시다. 몹쓸 병과 싸우는 것으로 안다. 흰 머리카락은 늘었고, 등은 굽어 자꾸 왜소해지신다. 그런 그 분의 뒷모습에서 나는 종종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 오늘같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언젠가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세월을 본 후부터였다.

그날도 그랬다. 내게 주어진 일만 생각하며 집을 나서는데 맞은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셨다. 옆 동네에 사시기에 가끔씩 이렇게 마주친다. 운동 삼아 나선 길이셨다. 마주 서 몇 마디 주고받고 뒤돌아서는데 울컥했다. 염색할 날이 지났는지 삐죽이 삐져나온 흰 머리카락하며 축 처진 어깨, 살짝 굽은 등…. 언제까지나 당당하고 건강하시리라 믿었는데 이제는 늙으셨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삶에만 연연해 부모님의 삶은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지 모른다.

황해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중학생 때 피난길에 올랐다. 칠남매의 막내아들이었던 아버지는 1.4후퇴 때 “너라도 살아라.”하며 등 떠미는 부모님과 누이동생을 남겨두고였다. 그 때 형님 다섯 분은 모두 군인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고향집에 다니러 갔다가 쫓겨 절벽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는 등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 그 후로 어머니의 고향인 백령도에 정착을 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외로움을 모르는 분이었다. 혈혈단신이라는 것조차 잊게 할 만큼 냉정하고 엄했다.

어린마음에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학용품을 사야할 때나 용돈이 필요할 때도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야할 만큼 가까이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고등학생이 되어 온갖 책에 빠져 있을 때 소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드클리프가 꼭 우리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다.

친정집에 다니러 간 날이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며 “저희들 왔습니다.” 하는데 방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 중이셨다.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는 것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전해왔다.

“아무개냐? 나 누구다.”

“허허… 반갑다 반가워.”

“뉘 집 결혼식에 갔다 네 연락처 알았잖아.”

“한 번 만나자. 네가 올래? 내가 갈까?”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코흘리개 적 고향친구 몇몇의 연락처를 아셨잖니. 아까부터 여기저기 전화하시며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그동안 한마디 말도 없기에 고향친구는 없는 줄 알았잖아. 좋아 죽는다, 죽어…. 당장이라도 달려가려나 보다. 궁금하고 보고파서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하며 덩달아 신명이 나셨다.

83년 한창 이산가족 찾기로 TV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밤을 밝히던 때, 여의도 만남의 광장에서 아버지는 둘째 형님을 만났다. 전쟁당시 다섯 분 모두 군 복무 중이었기에 이미 이 세상 분들이 아니겠거니 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참여했다. 며칠이 지나고 포기할 무렵,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아마도 그날은 공군기가 남하해 한반도가 초 긴장상태인 때였지 싶다. 만나자마자 다시 또 이산가족이 되어야하나, 하며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만남의 기쁨도 잠시 큰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셨다. 나는 그 때도 아버지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때도 친정집에서였다. 금강산에서 하는 이산가족 상봉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계시기에 “아버지는 가보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여쭈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저기 가 본들 뭐 하겠냐, 고향이 아니긴 여기나 저기나 매한 가지인 걸.” 하시며 일축해 버리시기에 마음 한 편으로는 짠하면서도 어찌 저리도 냉정하실까 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동무를 반기는 모습에서 그동안의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순간 가슴에 뜨거운 것이 한 덩어리 치밀어 올랐다. 단지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렇게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저녁 무렵 학교에서 귀가해 밤톨만한 삶은 고구마 하나를 먹은 것이 그만 체하고 말았다. 약을 먹고 사혈을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나을 기미가 없었다. 먹지도 못하고 앓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슬그머니 사이다 한 병을 내밀었다. 입만 축이고 내려놓는 것을 보더니 “다 마셔라, 다 마셔야 내려간다.” 하며 등을 쓸어 주셨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웬일이실까 했지만 이것이 사랑이었지 싶다. 특히나 내게는 이따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네 딸의 음식 솜씨를 일일이 열거하며 그래도 셋째 딸 음식이 제일 맛깔스럽다고 맛있게 잡수셨다. 해질녘까지 일터에서 늦으시는 어머니대신 저녁을 지어 놓을 때도 대견해 하며 잘 했다 하시곤 했다. 가까이 다가서기에 어렵다는 이유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시다 했던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오남매의 셋째 딸인 나는 아직은 어머니가 정정하시고 위로 언니 둘,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는 것에 많은 위안을 삼고 있다. 한 집안의 맏며느리라는 것에 늘 마음에 압박감을 안고 살다보니 내 피붙이보다 시댁식구들을 먼저 챙겨야 했고 마음마저도 빼앗기곤 했다. 늘 그래서 속상했지만 그래도 내 엄마니까, 내 아버지니까 다 이해해 주리라 여겼다. 이렇게 내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갑지 못했던 지난날이 아픔으로 안긴다. 오십 문턱에 서서 여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이 못난 딸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니 이제야 철이 드는가 보다. 너무 늦지 않은 깨달음이었으면 한다. 내일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굴비라도 한 두름 사가지고 뵙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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