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죽 지갑을 데리고 / 김원순

 

양가죽이라 하였다. 부드러운 것이 흡사 아기의 살갗 같았다. 다정한 친구의 손처럼 친근감마저 드는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은근히 유혹하는 저 고혹적인 흑장미 빛깔이라니! 우아한 그의 모습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던 나는,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낡은 지갑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낡고 칙칙한 지갑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손때와 온기와 성정(性情) 마저 품고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무슨 옷을 입던지 우쭐대거나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따라나서던 고마운 지갑이었다. 잡다한 것들로 제 속을 채우거나 텅 비워 버려도 노여워하지 않고, 세상의 바람에 흔들릴까 봐 내 삶의 뿌리를 단단히 잡아 주던, 보잘것없지만 큰 의지가 되던 든든한 지갑이기도 했다.

함께 한 세월만큼 다시 살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지갑이다. 크고 작은 상처도 품어 안고, 함부로 대하여도 속내를 쉬 드러내지 않는 무던한 지갑에게 느닷없이 헤어지자고 하였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서운했을까. 그러나 낡은 지갑은, 내가 밀쳐 둔 구석진 자리에서 여류하는 시간의 강물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끼처럼 앉을 세월의 더께를 담담히 맞이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듯했다.

고혹적인 빛깔만 아니었어도, 그날 백화점 앞을 지나가지만 않았어도, 내 안에서 부는 바람과 길을 나서지만 않았어도, 그 우아하고 고혹적인 양가죽 지갑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낡은 지갑 곁에 무심히 앉아서 내 안의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행의 물살이 아무리 거세어도 정형화된 내 의식의 뿌리를 흔들지 못했는데, 이제 내가 그 뿌리를 스스로 뽑으려 하고 있으니 내 안의 바람은 언제쯤이면 소리 없이 잦아들까. 삶의 애환이 곳곳에 배인 낡은 지갑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나를 은근히 유혹하던 그 양가죽 지갑을 데리고 총총 집으로 돌아왔다. 차창에 비치는 내 모습이 몹시 낯설기만 했다. 사막 같은 배경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양가죽 지갑처럼 화려하고 고혹적인 것으로 겉모습을 포장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내 마음이 어느새 저 고혹적인 빛깔에 닿게 되었을까. 바위와 나무, 구름 같은 빛깔들을 언제 몰아내 버렸을까. 삶의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먼 하늘 끝자락에 걸리던 무지개처럼, 내 마음이 잠깐 고혹적인 흑장미 빛깔에 머물렀을 것 같았다. 삶이 무미건조해질 때마다 일탈을 꿈꾸던 내 마음자리에 스며들던 것들이 모두 선명한 핏빛이었던가.

낡은 지갑 속의 것들을 새 지갑으로 옮긴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 고혹적인 빛깔도 내 삶의 때에 묻혀서 낡은 지갑처럼 늙어가고 있었다. 부드럽기 때문에 미세한 먼지와 작은 상처조차 끌어안아야 했던 양가죽 지갑은 그 곱던 시절이 그리운지 쓸쓸히 돌아앉아 있었다. 그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내 몸을 닦듯이 정갈하게 닦아 주는 것뿐이다.

유효 기간이 지난 콜드크림으로 천천히 구석구석 정성껏 닦는다. 언제 한 번 지갑과 마주 앉아 본 적이 있었던가. 오톨도톨한 무늬가 반쯤 닳은 자리마다 세월의 때가 수심처럼 고여 있다. 우물물을 길어 올리듯 조심조심 길어 올린다. 하얀 천에 묻혀 나오는 세월의 때만큼 선명히 드러나는 흑장미 빛깔이 노을처럼 곱다.

이 고혹적인 빛깔이 묻힐 때까지 나는 무엇에 열중하며 살았던 것일까. 헤일 수없이 여닫던 지갑처럼 바삐 살다가 텅 빈 지갑처럼 삶이 공허해지면, 잃어버린 지갑을 찾듯이 허둥대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내 삶의 빛깔도 저처럼 바래지면 누군가의 손길을 조용히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삶의 때와 주름에 가려진 채 살아온 양가죽 지갑이 노을처럼 또한 섧다.

부드럽다는 것은 거칠거나 모난 것들을 품어 안아 주는 어머니의 품 속 같은 것일 것이다. 그것들을 변화 시키거나 도전케 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드럽기 때문에 잘리거나 짓밟히기도 하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안으로만 삭여내는 양가죽 지갑의 부드러움이 손금 사이로 스며든다. 문득 내 손에서 사라진 부드러운 것들을 하나씩 불러보고 싶었다.

소슬바람에도 저항할 줄 모르는 풀들의 허리를 사정없이 잘랐던 일이며, 어렵사리 싹을 틔운 아이의 생각들을 마구 짓밟은 일이며, 끈을 풀고서 당근밭으로 내달았던 '두리'의 엉덩이를 매몰차게 때렸던 일들이 흑장미 빛깔보다 선명히 떠오른다. 내 지갑과 장갑과 부츠와 점퍼가 되어준 수많은 양들도 누군가의 손에서 사라지지 않았던가. 사라진 수많은 양들의 울음소리가 방 안 가득 번져온다.

단 한 번도 두 발 달린 사람의 허리를 떠받거나 까치밥으로 남긴 홍시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초원의 풀들도 하루 먹을 만큼만 소유하던 순하디 순한 양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햇살 좋은 날, 이슬처럼 맑은 눈망울이 그믐달처럼 스러지고 난 뒤 어린 양들의 젖 울음이 핏빛처럼 번졌을 것이다. 내 차가운 몸을 따뜻이 감싸준 양들처럼 나도 누군가를 따뜻이 감싸주어야 할 텐데, 무심한 세월 속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내 마음이 언제 또다시 저 고혹적인 흑장미 빛깔을 떠날지 모르겠다. 어떤 빛깔에 닿게 될지도 전연 모른다. 흑장미 빛깔과 칙칙한 검갈색 사이를 오가며 내 낡은 지갑처럼 늙어 갈 것이다. 우아한 양가죽 지갑의 힘을 빌려 잠시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낡은 지갑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빈 지갑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양가죽 지갑을 데리고 길을 나선다. 노포동 역 앞 오일장이 선 날이라서 날씨가 매우 화창하다. 채소와 과일, 생선 등, 부드러운 것들로 가득 찬 그곳은 꾹 다문 지갑들의 입을 활짝 열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새 지갑인지 낡은 지갑인지 묻지 않는 그곳은, 방금 그물에서 끌어올린 물고기의 비늘처럼 여기저기에서 번뜩거렸다, 지갑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양가죽 지갑을 놓칠까 봐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를 데리고 다닌 것이 아니라 그가 여태 나를 데리고 다녔구나.

양가죽 지갑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우아한 지갑과 오랫동안 다녔지만 조금도 우아해지지 않는 차창 속의 내 모습이 나를 보고 자꾸만 웃는다. '나'라는 낡고 칙칙한 지갑 속에는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길래, 나와 어울릴 수 없는 빛깔 쪽으로 자꾸 기웃거리게 하는 것일까. 빈 지갑 속의 먼지처럼 웅크리고 살았던 내가 낡은 지갑 속에서 기지개를 켜며 세상 밖을 자꾸만 기웃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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