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가 떨어졌네! / 허정진단추가 떨어졌네! / 허정진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가 걸어간다. 무릎에서 옷깃까지 둥글고 큼직한 단추가 빠짐없이 옷을 잘 여미었다. 코트에 단추 하나가 없어 찬바람이 드나든다면 서글픈 마음이 들뻔했다. 빠르고 간편한 지퍼가 유행하는 시대에 천천히, 서로 어긋나고 빠진 곳 없이 단추로 채운 코트 차림이 오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단추는 느림이다.
단추가 잘 채워져야 외풍도 막아주고 몸을 따뜻하게 보호한다. 내 몸의 맨살이 드러나는 것도 막고 자외선으로부터 피부 노출도 방지한다. 젊었을 때는 단정하지 못한 탓인지 외투 단추를 채우지 않고 펄럭거리며 나다니거나, 셔츠 단추도 두서너 개는 풀어 가슴팍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제 나이가 들고서는 심장에 바람이라도 들까 봐 단추란 단추는 죄다 채우고 얌전하게 입는다.
길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단추 하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일부러 단추를 떼어내지는 않았을 터, 또 누군가의 하루가 꽉 채워지지 않은 채 절뚝거리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쓸쓸함이 느껴진다. 옷차림이 후줄근한 중년의 남자가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며 가는 날도 있다. 어깨가 축 늘어진 것도 모자라 와이셔츠 손목 끝에 실이 풀려 대롱거리는 단추 하나가 밥벌이의 고단함과 내일의 막막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단추 꿰맬 일이 별로 없다. 직장에서 은퇴해 와이셔츠 입을 일도 없고, 요즘 옷들이 대부분 편리한 지퍼 스타일이라 단추 떨어질 일도 없다. 남자이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도시로 유학 생활을 하느라 웬만한 손바느질 정도는 익혀 스스로 수선해서 입었다. 꿰매고 기우며 살아내야 하는 인생살이인 것처럼 떨어진 단추나 해진 옷을 스스로 고쳐 입는 일도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삶의 한 방편 같았다.
험한 일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맨몸으로 살아내느라 입고 있는 셔츠나 작업복에 걸핏하면 단추가 떨어졌다. 언제 떨어졌는지도 몰랐기에 대부분 그 단추를 잃고 말았다. 그때는 여분의 단추도 없던 시절이어서 할 수 없이 엇비슷한 모양이나 색깔을 찾아 짝을 맞추어야 했다.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인생에서 또다시 실패하지 않겠다는 듯 단춧구멍이 꽉 막힐 정도로 촘촘히 실을 꿰매기도 했다.
그래도 단추 크기는 같아야 했다. 옷에 뚫린 구멍보다 단추가 너무 작으면 채워지지 않고 너무 크면 끼워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춧구멍처럼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억지로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내 삶과 운명을 누가 대신할 수 없듯이 처음부터 정해진 단추 외에는 함부로 단춧구멍을 늘리거나 줄일 수도 없었다. 단추와 구멍 사이, 안과 밖, 꿈과 현실 사이에서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단추를 채워보면 안다. 단춧구멍과 단추가 잘 맞지 않으면 세상도 그렇게 쉽게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서로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으면 옷이 울어 제대로 입을 수도 없다는 걸. 단추나 구멍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옷은 불량이 된다는 걸.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전부 순서가 맞지 않다는 걸. 어린아이가 자기 옷의 단추를 채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듯이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도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단추는 항상 제자리가 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일탈이다. 그 ‘인생의 첫 단추’를 두고 자기 생에 대해 더욱 엄격하고 신중했어야만 했다. 누군가에게는 잘못된 첫 단추 때문에 뒤늦게 후회와 원망을 가져오기도 한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먹과녁 같은 초행길이기에 살다 보면 다시 단추를 풀고 채우기를 반복하는 일도 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운명적인 삶을 참고 살아내기도 한다.
단춧구멍이 없으면 단추는 무용지물이다. 겉으로 화려한 색깔과 장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단추지만 그 뒤에서 자신을 감추고 뒷바라지하는 존재가 단춧구멍이다. 앞에서건 뒤에서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각자의 의미와 역할을 가진 존재들이다. 단추는 작아도 서로의 빈자리는 크다.
단춧구멍은 단추의 집이다. 단추에 꼭 맞는 짝이어야 제집인 듯 편안하다. 단추를 구멍에 끼우는 것은 짝을 맞추는 일이다. 학교에서도 짝꿍이 있고, 부부에게도 천생배필이 있고, 인생길에도 동반자가 있다.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그 조그만 단추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 목덜미까지 가지런하게 채운 옷을 보면 그 삶이 정결해 보인다. 꽃의 짝은 나비이고, 바람의 짝은 구름이듯이 그렇게 짝을 잘 맞추어 살아왔을까 되돌아본다.
흐릿한 백열등 아래서 대견스러운 듯 자식들 교복에 금빛 단추를 다는 어머니의 미소, 뒤늦게 실이 늘어진 와이셔츠 단추를 발견하고 출근길 남편을 세워놓고 급히 꿰매는 아내의 가쁜 숨소리. 누군가를 위해 단추를 달아주는 그 모습들이 추억 속의 장면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 삶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거창한 일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모양이다. 살다 보면 그런 소소한 것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기억들로 남아있다.
봄의 들판에 민들레, 꽃마리, 할미꽃들이 지천이다. 모두 동글동글한 꽃 단추들이다. 세상에 용쓰지 않고 안간힘 다하지 않고 선 하품하듯 그저 피는 꽃은 없다. 나는 어떤 단추 꽃일지? 비록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순응하며 제 깜냥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실밥이 풀려 달랑거리는 일 없이 악착같이 내 생을 붙들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