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고통 / 김미원

 

커서가 0.5초 간격으로 깜박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마음이 급해지고, 급기야 가슴이 답답해진다.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이 날아다니지만 내 손가락은 그것을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커서의 깜박임이 다급하게 다가와 어떤 단어든지 입력시킨다. 그러나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지운다. 나는 문장의 주변을 맴돌고, 커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교양영어 시간에 배운 ‘Pleasant Agony’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즐거운 고통’쯤 될까. 즐거운 고통이라니? 고통스러운 즐거움은 어떨까? 고통을 즐긴다니 마조히스트의 단어 같지만 진리는 역설이라 했던가. 소위 창작이란 걸 하면서 글을 쓰는 행위야말로 즐거운 고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쓰기는 엉켜있는 실 꾸러미를 풀어 스웨터를 짜는 일이다.

작가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환자이고 독자는 관음증 환자이다. 작가는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 만족을 느끼고 독자는 작가를 훔쳐보는 즐거움을 느낀다. 작가가 속옷까지 벗고 수없는 장치를 해도 영악한 독자들은 어디까지 벗었는지 안다.

엉켜있는 생각을 풀어내 멋진 스웨터를 짜낸다 해도, 용기를 내 마지막 실오라기까지 다 벗는다 해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데 또 다른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해 아래 재 것이 없다는 말에 위안을 삼기로 한다.

 

한때 시니컬한 게 좋았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힘이 지배하던 시절, 언론 검열로 가위질되어 하얀 지면으로 얼룩진 신문들 속에서 행간의 뜻을 찾고자 했던 습관 때문일까. 꼬아보고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면 새로운 사실도 보인다.

그러나 수필가의 시선은 달라야 할 것 같다. 그렇다. ‘point of view’가 문제다. 시니시즘이 아닌 따뜻한 시선, 자기 긍정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리라. 자기 삶을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따뜻한 글이 나오지 않겠지.

나는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나 되게 만드는 상실감’에 대해 기록하고 싶다. 한때 목소리를 팔아 사랑을 얻으려 했던 인어공주처럼 극심한 고통을 팔아 신음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으나 그것은 인생을 잘 모르던 시절의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의 연속이었으니까. 예기치 않은 복병도 있었고.

당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 769-824)는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무릇 만물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내게 된다. 사람의 언어도 이와 같아서 부득이한 일이 있어 말을 한다. 사람이 노래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이고 우는 것은 마음에 품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평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미물도 평안함을 얻지 못할 때 소리를 지르는데 오욕 칠정을 가진 인간임에랴. 평안하지 못할 때 내는 소리가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수필이 된다. 마음의 상처가 깊을수록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내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인생이 너무 힘들어 땅으로 꺼지고 싶거나 너무 가벼워 날아가지 않을 정도의 상실감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 자고(自高) 하지 않을 정도의 육체의 가시, 마음의 가시가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욕심임을 안다. 3인칭 시점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듯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고 즐거움조차 남의 것인 양 객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모습을 1인칭 시점으로 속울음을 기록하고 싶다. 글을 쓰면서 ‘내가 살아있구나’라고 느끼고 싶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받을 만하다. 받을 가치가 있다’는 뜻을 가진 ‘deserve’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그리고 그 단어의 교만함을 경계한다. 지금 누리는 이런 행복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내가 받을 가치가 있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 처음으로 생각하고, 중심을 생각하는… 처음과 중심에 추 하나 달고 싶다.

문학이 남의 아픔을 치료제 삼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라지만 나는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다. 또한 일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의 아킬레스건에 대해서도 애정을 갖고 싶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너무 어려워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를 고민하거나 묻지 않아도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느껴질 수 있고, 만져질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내 글은 재미있으면 좋겠다. 뭔가 느낌이 있으면 더 좋겠다. 내 글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죽비소리는 못되지만 작은 울림 정도라도 되길 바라며 낱말의 위력을 믿는 나는 지금 커서와 눈싸움을 하며 즐거운 고통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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