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한국문학인상 (수필부문) 수상

 

모란이여! / 신노우 

 

 

누가 향기 없는 꽃이라고 했던가새벽 운동을 마치고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나를 와락 안아버린다황홀하다톡 쏘지도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다그저 넌짓 하고 쌉쌀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해서 맡을수록 그 향기에 자꾸만 정신이 몽롱하게 빠져든다.

 

사는 아파트 계단 입구에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는 모란 한 무더기가 있다사계절 그저 그곳에 있는지 모를 만큼 볼거리 없는 외양이다그러다가 을씨년스러운 겨울 추위가 오는 봄에 쫓겨 꼬리를 감출 즈음에 불쑥 가지 끝에 꽃봉오리를 내민다북풍한설을 꿋꿋하게 견디고 봄을 먼저 구가하기 위해 생강나무산수유히어리 다음으로 일찍 피는 꽃나무 중에 하나다.

 

올해 봄은 가뭄이 심각하다저수지 바닥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연일 보여 준다모란이 심어진 화단에 바람에 뽀얀 흙먼지가 날린다그래도 모란은 투정하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가지마다 잎을 만들고 어느새 봉오리가 제법 봉긋하다잎이 나면서 중심에 꽃봉오리를 보듬고 자라는 모양새가 기특하다.

 

어느 날 귀갓길에 모란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오랜 가뭄 탓일까잎사귀가 모두 땅바닥을 향해 축 늘어져 절을 하고 있다내일 아침에는 물 한 양동이라도 줘야겠다고 내 무심을 질타한다다음 날 새벽 운동을 나서는데 아스팔트가 젖었다밤새 비가 내렸는가 보다그런데 모란꽃 주변에는 거짓말같이 물기라곤 없다옆에 커다란 목련 나무의 무성한 잎이 우산이 되어 보슬비를 다 받아먹었다다투지 말라는 듯 그다음 날 다시 비 선물을 받았다모란꽃이 심어진 밑 흙을 파 보았다제법 촉촉하다아니나 다를까 모란 잎이 모두 하늘바라기로 싱싱하다성질 급한 꽃봉오리 몇 개는 어느새 붉은빛으로 열정을 토해내기 시작한다달콤하고 끌어당기는 듯이 은근한 그 향기에 취할 생각에 벌써 가슴 바닥이 들썩거린다.

 

모란꽃 앞에 선다풍성한 꽃잎은 넉넉한 웃음으로 나를 맞는다심호흡으로 그 향기를 맡노라니 스트레스로 생긴 마음의 주름을 한꺼번에 좍 펴 주며 뭉게구름 위를 걷는 양 무한 힐링이 된다손바닥만 한 열네 장 검붉은 꽃잎은 꽃가루를 열네 살 순정처럼 가슴에 겹겹으로 감추었다꽃잎은 아침 햇살에 요염하게 펼쳤다가 석양 따라 다소곳이 접기를 반복한다그러나 열흘을 채 참지 못하고 몽정하듯 노란 꽃가루를 툭 쏟으며 사고를 쳐 버린다암술과 수술이 드디어 합방한 것이다이제 밤이 와도 그전처럼 곱게 서로를 애틋하게 보듬지 않는다그저 심드렁하게 오므리는 척만 하는 것이 꼭 지금에 우리 부부의 사랑 같다.

 

새벽 운동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요즘 모란꽃 향기에 흠뻑 취해 산다고 자랑하였다무슨 소리냐며 모란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우긴다향기가 있다는 설명을 반복하여도 도무지 믿지를 않는다운동을 마치고 모란꽃에 가보면 알 것이 아니냐고 안내하였다모두가 선향에 감탄하며 꽃가루가 코끝에 묻히는 줄도 모른 채 꽃잎에 마구 들이댄다.

 

꽃이 다 지기 전에 황홀한 향기와 넉넉한 모습을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어 한 송이를 꺾는다신문지 속에 곱게 넣어 말려서 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식힐 압화 부채 만들기를 한다하얀 한지를 바른 큰 부채 위에 안방마님같이 품위 있게 말려진 검붉은 모란꽃 한 송이를 부채 중심에 놓는다그 위에 코팅지를 덮어 가장자리 전체를 눌러 붙여 완성한다한 번의 부채질에도 시원하다따가운 햇빛 가리개로도 그만이다.

 

바람이 분다봄이 무르익는다탐스러운 붉은 모란꽃잎도 봄바람에 몸을 맡기다가 씨방의 결실을 확인하고 하나둘 맥없이 꽃잎을 떨구며 이별한다봄바람은 떨어진 꽃잎마저 이리저리 쓸어버린다그 고운 자태는 어디로 가고 푸른 잎사귀만 시침을 뚝 떼고 성성하게 자리했다.

 

눈을 감는다지난 세월의 짧았던 내 청춘과도 같은 붉디붉은 모란꽃그 그윽한 향이 코끝에서 너울춤을 춘다가슴 방망이 치는 첫사랑 같은 널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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