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하학에 관하여 / 구 활
‘오우가’ ‘어부사시사’로 널리 알려진 고산 윤선도도 나이 쉰 살 무렵에 성폭행 소문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고산은 결국 이 일로 반대 세력인 서인의 모함으로 경북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1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그러니까 남자의 허리하학에 관한 일은 로맨스와 스캔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요물이다. 그것이 관대하게 처리될 때도 있지만 잘못 걸리면 관직박탈 귀양 등 정치생명이 끝장나는 수가 흔히 있다.
조선 인조 11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 태종이 직접 나선 전쟁은 조선의 완패로 쉽게 결론 나버렸다. 해남에 머물고 있던 고산은 노비 수백 명을 무장시켜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했다. 항해 도중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패전 소식을 들은 고산은 뱃머리를 남으로 돌렸다.
강화도 부근 어느 포구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준비를 할 때 동서인 이희안의 노비 세 사람 중 늙은 계집종의 어린 딸이 고산의 눈에 들었다. 배에 태워 첩으로 삼았다. 나중 고산의 서자 학관의 어미가 된 어린 처녀의 당시 나이는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이런 정보를 전해들은 서인들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마마, 해남의 윤선도는 전쟁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상감께 문안 인사를 오기는커녕 조정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까지 왔다가 피난 중인 어린 처녀를 강제로 배에 싣고 돌아갔다고 하옵니다.” 이른바 고산의 성폭행 사건의 전말이다. 인조도 서인들의 상소를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귀양 결정에 이의를 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본능엄경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화류암(花柳岩) 전(前)에 활로(滑路)가 다(多)하니 행인(行人)이 도차(到此)에 진차타(盡蹉跎)라!” 쉬운 말로 바꾸면 “화류암이란 바위 앞에는 미끄러운 길이 많아 지나가는 행인이 여기에 이르면 너나없이 모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똑똑한 벼슬아치이자 대시인인 고산도 예쁘장하게 생긴 노비의 어린 딸로 위장되어 있는 화류암 앞을 지나다 홀라당 미끄러져 육신의 자유가 제약받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노비나 노복의 딸을 첩으로 삼는 것은 예사요, 심지어 성의 노리개로 이용했어도 종들은 항의 한번 하지 못했다. 시대의 관습이나 시속이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반 주인이란 권위와 위세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성행위를 강요한 것은 분명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고산은 서인들의 질책과 탄핵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홍길동전」을 쓴 교산 허균도 천하의 난봉꾼이다. 그는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강원도 도사로 나갔다. 부임하자마자 서울의 기생들을 불러 놀아나다 6개월 만에 파직 당했다. 끓는 피를 참지 못하던 허균이지만 여행 중 객고나 풀라며 전북 부안의 기생 매창이 자신의 나이 어린 조카딸을 객사 침소에 들여보냈을 때는 분명하게 거절했다.
허균이 쓴 「교산기행」을 보면 “신축년(1601) 부안에 닿았다. 김제군수 이귀의 정인인 기생 매생을 만났다. 그녀는 거문고를 갖고 와 시를 읊었다. 얼굴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이야기를 나눌만 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침소로 들여보내준 아이는 내가 돌려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물아홉인 시인 기생인 매창은 온종일 비가 내려 술맛 당기는 날, 맘에 드는 두 살 위인 문인 나그네에게 자신의 몸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3개월 전에 떠난 정인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대타를 기용했지만 풍류객인 허균은 얼른 알아차리고 핀치히터의 환대를 은근 슬쩍 피해가는 멋을 부렸다. 이것이 풍류이자 낭만이다.
진짜 낚시꾼은 단 한 대의 낚싯대로 물고기를 잡다가 돌아갈 땐 모두 놓아준다. 정말 풍류를 아는 프로들은 닥치는 대로 잔챙이까지 살림망에 집어넣지는 않는다. 풍류를 제대로 모르는 국회의원이 여기자의 젖가슴을 만지는 성추행 사건을 저질러 나라가 온통 시끄럽길래 고산과 교산에게 한 수 배우라고 이 글을 썼다. 국회의원들은 대체로 귀가 어두워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