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놀이 / 곽흥렬 

덩실덩실, 신명난 춤사위가 허공을 가른다. ‘얼~쑤, 얼~쑤’, 연신 넣어대는 추임새로 애드벌룬 띄우듯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둘러선 구경꾼들의 눈과 눈이 일제히 춤판으로 모아진다. 등장인물과 관객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었다. 학부 시절, 수양버들 해 그림자가 장승처럼 키를 키우던 어느 봄날 오후는 그렇게 깊어갔다.

일청담日淸潭 연못가의 잔디 광장에서 한바탕 거방지게 놀이마당이 펼쳐졌었다. 난생 처음으로 구경한 그날의 탈춤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것은 여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였고,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감동이었다. 그때의 감동이 기억 저편에 깊숙이 각인된 채 오랜 날들 동안 나를 지배했다.

안동의 하회 민속마을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강산이 두어 번이나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였다. 하회는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탈의 고장이 아닌가. 아마도 그래서이지 싶다. ‘하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탈춤이다. 별신굿탈놀이의 전승지傳承地인 그곳을 언젠가는 꼭 한번 찾아가 보리라. 가서 하회탈의 원형을 만나고 오리라. 이렇게 벼르고 벼르던 다짐을 그때서야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기괴한 형상의 탈과 탈들이, 띄엄띄엄 들어선 민속품 가게를 점령하고서 방문객을 맞는다. 뭉툭한 코에 치켜 올라간 눈꼬리, 헤벌쭉이 벌어진 입, 웃는 듯 우는 듯 찡그린 듯 조롱하는 듯한 표정,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모습들이다. 그 얼굴들에서 억눌림 당하고 천시 받으며 헤쳐 온 하층계급의 질곡의 삶을 읽어낸다. 험상궂은 것 같으면서도 익살맞고, 친근감이 들면서도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는 하회탈, 그 야릇한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나는 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정신을 혼곤하게 만드는 밤꽃 냄새 같은, 남녀의 밀고 당김과 떨어졌다 엉겨 붙음의 그 끈적이는 몸동작이 어쩐지 생리에 맞지 않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유독 탈춤에서만큼은 그러한 역겨움이랄까 거부감 같은 것이 느껴지질 않는다. 그것은 탈춤 속에 감추어진, 세상을 향한 희화적이면서도 준열한 꾸짖음 때문이라고 해도 좋겠다. 탈춤은 탈 난 세상을 질타하는 아웃사이더들의 몸짓언어이다. 때로는 해학적으로, 때로는 능청스럽게 양반의 허위의식을 꼬집고 파계승의 일탈을 조롱하며 과부의 부도덕을 나무란다.

탈은 처음 생겨날 때 풍자를 위해 고안된 물건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힘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적할 수 있는 아주 안성맞춤인 무기가 된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풀려나가는 듯 시원스럽고 통쾌한 배설, 여항의 울림과 웃김이 탈춤의 표정 속에 살아 숨 쉰다. 이렇게 탈은 본래 건강한 평민 정신을 대변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가면으로 변질이 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단단히 탈이 나 버렸다고나 할까.

이따금 우리네 세상살이라는 것이 어쩌면 한마당의 가면놀이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늘날처럼 생존경쟁이 예각으로 날을 세운 때가 있었던가. 이 치열한 삶의 현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만 가면을 강요하는가 보다. 그리하여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서 ‘나 아닌 나’로 행세하게 만든다. 이는 마치 이해 당사자들은 뒤로 물러나 앉고, 대리인들끼리 나서서 다툼을 벌이는 것 같은 형국이다.

사실 점점 더 가면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내기가 벅찬 세상이 되어간다. 그래서 내남없이 마음의 가면 하나씩을 쓰고 타인을 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성 상실을 불러온다. 내가 남을 믿지 못하고, 똑같이 남도 나를 믿지 못한다. 온갖 사기며 협잡이며 허언이 판을 친다. 그러다 보니 번히 눈 뜨고도 코 베임을 당하기 일쑤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들 위에 올라서려고 눈에다 핏발을 세운다. 이 팽팽한 긴장은 진흙탕 속에서의 다툼처럼 처절하다. 이런 격렬한 싸움터에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다. 한시도 경계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항시 탐정이 되어 지뢰밭 같은 생존의 현장을 헤쳐 가야만 한다. 자연 세상살이가 고달파질 수밖에 없다.

언젠가,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온 탈북동포들이 남한 사람들을 두고 하나같이 모리배 같다고 폄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의 그런 혹독한 비난에 대해 변해의 말을 찾지 못하겠다. 우리는 가면을 쓴 얼굴로 그들을 마구 짓밟지 않았던가. 아니, 그들이 우리의 발길질에 무참히 무너졌다는 표현이 오히려 옳겠다. 결국 선망의 대상이 거꾸로 저주의 대상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북녘 동포들은 비록 사는 형편이야 초라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때는 우리에 비해 훨씬 덜 묻었을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삶에 익숙지 못한 그들이, 북녘 땅에서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다가는 판판이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른 대 어린아이의 대결만큼이나 그 결과가 싱겁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어른의 능청스러움을 당해 낼 재간이 있을까. 오랜 세월 사회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지내 온 그들이, 적자생존을 최대의 미덕인 양 치부하는 자본주의식 무한 경쟁의 메커니즘에 적응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남을 밟고 서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남녘 땅 동포들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인가를 알아 버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으리라. 그래서 탈북자들은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손사래 치며 떠나온 북녘 땅을 다시 그리워한다. 어쩌면 고향 언덕으로 돌아가고파 남쪽 가지에다 둥지를 트는 월조越鳥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결국 그들의 세상살이 방식은 너무 순진해서, 이 치열하고도 냉혹한 자본주의 제도에서는 애당초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젖어 있으려니 이청준 선생의 소설 한 토막이 뇌리를 스쳐간다.

한국동란이 한창 치열하던 무렵이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칠흑 같은 한밤중, 어느 외진 산골마을에 느닷없이 한 무리의 무장군인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곤히 잠에 취해 있는 마을 사람에게 전짓불을 들이대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한다. 대답 여하에 따라 삶과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무시무시한 전짓불의 공포, 아군인지 적군인지 그 실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당하는 쪽은 언제나 전짓불에 노출된 쪽일 수밖에 없다. 전짓불 저쪽과 이쪽은 처음부터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전짓불은 이쪽의 정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쪽의 필패는 당연한 귀결 아닌가.

우리가 덮어쓰고 있는 마음의 가면은 바로 그 공포의 전짓불이다. 가면 속에 감추어진 얼굴의 선악을 판단할 수 없으니 대처 방안이 난감할 수밖에 없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늘어갈수록 세상살이는 그만큼 각박해진다. 겉으로는 살살 눈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악어 같은 사람, 이런 위인이야말로 실상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형일 터이다.

양심이 비 양심에 눌리어 기를 펴지 못하는 시대이다. 가면이 먹장구름처럼 세상을 뒤덮어 나갈수록 양심은 더욱 깊숙이 모습을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양심을 매운 금속성에다 빗대 놓고서, “가장 동지적이고도 격렬한 싸움”이라고 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불의에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결곡한 마음의 중심을 지켜내는 일이 그만큼 지난至難하다는 뜻일 게다.

훌훌 가면을 벗어던지고 맨얼굴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꾸미고 감추는 연출 대신 진솔한 생활을 가질 수는 없을까. 이제부터라도 가면은 정체를 가리는 허위에서 뛰쳐나와, 세상을 희화하고 세태를 풍자하는 본래의 목적인 탈로 되돌아와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검은 장막이 걷히고 서로 간에 튼실한 믿음의 다리가 놓여졌으면 좋겠다.

마음의 가면이 사라지는 날, 우리의 삶도 비로소 잃어버린 그 맑은 본바탕을 되찾게 되리라. 그런 세상이 꼭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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