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
얼마 전 떠나 버린 사람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건
시만 한 게 없지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
갈피를 꽂아 두었던
시의 가장 아픈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니
남은 문장들이 일제히 눈가에 젖어든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
― 김명기(1969∼ )
많은 책을 혼자 나른 적이 있었다. 배낭에 넣어 등짐으로 지고, 짐수레에도 가득 실어 밀어 옮겼다. 내 짐을 나 혼자 지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턱 앞에서 끙끙대고 계단에서 멈칫거릴 때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때 한 택배 기사님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더니 수레를 같이 밀어주었다. 이 무거운 걸 혼자 다 나를 거냐고,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힘을 보태준 것도 고맙지만 사실 그 질문이 고마워서 오래 잊지 못했다. 매일 이고 지고 나르던 그는 짐 지기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남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힘듦과 절망,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은 크고 깊어서 고작 상상 따위로는 닿을 수도 없다.
세상에는 보이지도 않은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많다. 가끔은 안 보이는 그 짐을 남에게 들킬 때가 있다. 반대로 우리가 타인의 짐을 알아차릴 때도 있다. 짐이 짐을 알아볼 때, 그것은 서로에게 기대어 고달픔을 나눈다. 짐의 총량이 줄어들 리가 없는데도 우리의 발걸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그것을 김명기 시인은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고 썼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라고도 썼다. 이 말은 진심이고 진실이다. 슬픔에는 슬픔이, 아픔에는 아픔이 친구고, 이웃이며, 쉼터가 된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