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채소지만 이건 고기잖아 / 구활
나를 키워 온 건 순전히 고향 하늘이다. 그 하늘 아래서도 개구리 울음소리와 소쩍새 울음소리가 안아주고 업어 주며 반 이상을 키워 왔다. 미당을 시인으로 만든 건 ‘팔 할이 바람’이지만 내가 커 온 건 고향 하늘 아래에서 들리는 이런 소리 덕이다.
개구리는 혼자 울지 않는다. 솔로로 울던 놈이 친구들을 끌어모아 끝내는 코러스로 운다. 그래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장엄하다. 높낮이가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박자를 어기는 법이 없다. 바이올린의 고음과 같은 현란한 음을 내지 않아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스님의 염불을 듣듯 듣고 있으면 소리 속에 내가 빠진다.
여름 저녁, 마당 복판에 두어 개의 멍석을 깔고 바람의 방향에 맞춰 여기저기 모깃불을 지펴두면 맨 먼저 찾아와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이 개구리 울음소리다. 개구리들은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화음을 맞춰뒀다가 별빛이 영롱해지기 시작하면 소리 공연을 연다. 뮤지컬 품바나 난타 그 이상이다.
개구리 울음소리도 일정한 통로를 거쳐 우리 집으로 오나 보다. 무논에서 익은 개구리 소리들이 뭉쳐져 에너지가 부풀게 되면 방천 둑 밑 뽕밭에서 익어가는 오디 열매를 떨어뜨리고 슬금슬금 앞집 두테네 단칸 초가지붕을 뛰어넘는다. 그러고는 하얀 감자 꽃이 피어 있는 우리 집 바깥마당을 돌아 안마당으로 기어들어 온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미리내가 흐르는 별 밭은 보석 가루를 뿌린 것처럼 찬란하다. 곧 별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다. 가만히 누워 알퐁스 도테의 ‘별’이란 소설을 기억으로 다시 읽는다. 나에게는 언제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별을 쳐다보다 지쳐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을 것인가란 공상에 빠져들면 슬프기만 하다. 그런 행운은 도저히 올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동네 고샅길에는 이병 놀이하는 아이들의 수런대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에 범벅이 되고 아이를 부르는 아낙의 음성이 멀리서 들리면 여름밤은 서서히 깊어간다. 멍석 위에서 펼쳐진 내 문학적 상상은 별의 시인 윤동주에게로 옮아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대목에 이른다.
문학은 통상 가난 속에서 살다가 생활 때문에 죽는다. 잠자듯 모로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야야, 내일은 깨구리를 잡아 닭 좀 믹이라.” 하신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모든 죽어가는 것까지 사랑하고 있는 문학 소년에게 닭의 영양공급을 위해 “개구리를 잡아 닭에게 먹여라”는 엄명이 떨어졌으니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개구리가 죽는 것은 이렇게 간단하다.
어릴 적 어머니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어머니의 “이 노무 자슥” 한 마디면 밥이며 옷이며 학교도 끝장이었다. 이튿날 오후, 철사 손잡이가 달린 거지깡통과 도리깨 열 나무 가지로 만든 채를 들고 어제 밤 개구리 소리가 가장 요란했던 논으로 사냥질을 나간다. 논둑에 앉아 소리 공연을 위해 목청과 의상을 가다듬던 개구리 배우들은 사냥 채 한 방이면 그들의 음악도 죽고 생애도 끝이 난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 문학도 생활 앞에선 이렇게 개구리가 되는 법이다.
뒤란 응달에 만들어 둔 화덕에 깡통을 얹어 불을 뗀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몇몇 숨이 붙은 놈들이 필사의 몸부림을 쳐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노란 기름이 물 위로 둥둥 뜰 때 새나오는 냄새는 정말 기가 막힌다. 배가 고플 때는 정말 환장할 정도다.
삶은 국물은 사료에 버무려 한갓진 곳에 밀쳐놓는다. 잘 익은 개구리의 뒷다리 살은 발라내 감나무 잎 접시에 담아 뒀다가 혼자만의 서머 파티에 메인디쉬로 올린다. 한 점 한 점 굵은 소금에 찍어 먹다 너무 짜면 우물에서 갓 퍼온 찬물 한 잔을 마신다. 나물 먹고 물 마시는 대장부 살림살이는 하급이지만 개구리 뒷다리 먹고 물 마시는 살림살이는 고급이다. 그건 채소지만 이건 고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