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탓 / 김종란
쥑일 놈, 벨아처먹을 놈, 다리몽디를 뿐지를 놈, 모질고 사나운 욕지거리가 내 앞에서 쏟아진다. 그럴수록 나는 태연하다. 입말보다 글말을 생각해야 한다. 껍데기 말은 던지고 고갱이 말을 찾아내야 한다.
처음에는 이웃 할머니가 들고 온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주기만 했다. 까막눈에 잔귀까지 먹은 할머니는 점점 주변을 의식한다. 도회지에 사는 할머니의 딸이 보낸 편지였는데 내용이 뭔가 심상찮다. 그러자 할머니는 편지가 오면 나를 데려가기 시작한다. 편지를 읽어준 뒤 답장까지 써야 한다. 편지지 앞에 수북한 먹거리를 내놓지만 나는 도리질을 치며 손도 대지 않는다. 어느 때부터 할머니는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쥐어준다. 내가 손을 펴지 못하도록 할머니는 자신의 손을 덮씌우며 꽉 움켜쥔다.
“암말 말거래이!”
짧은 말 속에 많은 뜻이 있음을 알고 나는 정말 암말을 않는다. 거절하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않는다. 집에 와서는 할머니 딸의 사연을 말하지 않는다. 편지를 써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글 모르는 이웃 할머니를 대신해서 편지를 써주고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주는 옆집 중학생일 뿐이다. 암말 안 할수록 할머니와의 관계는 지속된다.
전화기가 없던 그 시절, 할머니의 딸은 자신의 처지를 편지로 서서 친정어머니와 상의했다. 아이 둘을 두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 딴 살림을 차린 상황으로 기억한다. 씨알머리 없는 ㅇ가 놈들, 천하에 없는 쌍놈 집구석, 씨알데기 없이 살지 말고 당장 내려오라며 분통을 터뜨리다가도 손자들을 들먹일 땐 훌쩍거린다. 편지지 앞에서 나는 할머니의 욕설을 거르고 사투리를 다듬고 격정을 덜어낸다. 어떻게든 할머니의 중심말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 물론 ~해라, ~하지마라, 말투로 현지에는 속속들이 할머니의 마음보를 깐다.
할머니가 눈을 끔벅이며 쥐어주는 종이돈이 50원에서 100원으로 바뀐다. 편지 갑의 효과로 나는 달달한 씀씀이를 누린다. 잉크는 늘 넉넉하여 친구들에게 따라주고 펜촉 심도 갈라지기 전에 바꾼다. 필통에는 색깔 다른 볼펜까지 들어 있다. 빨아 쓰는 헝겊 생리대가 귀찮으면 어느 날엔 약국에서 생리대를 사보기로 한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대구로 가던 날 할머니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버스표를 끊어주었다. 그날, 할머니는 그간 한번도 준 적 없었던 빳빳한 500원 지폐를 좍 펼치며 건네었다. 암말 없이 받은 할머니의 마지막 지폐였다.
어느 해인가. 고향 골목에서 사내아이 둘에게 휘둘리고 있는 할머니를 만난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돌린다. 지난 날 할머니가 외쳐대던 욕 탓인가. 할머니의 말을 받아 적은 글 탓인가…. 할머니의 딸은 내가 보낸 숱한 편지글의 소용돌이에서 결국은 남편과 헤어졌고 아이 둘은 친정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웃짐을 떠안은 할머니가 안쓰럽다. 할머니를 휘감으며 생떼를 쓰는 아이들도 딱하다. 한때 꼬짓한 지폐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쥐던 내 손이 움찔댄다.
글귀 어두운 할머니의 글눈이 되었지만 내 글은 여럿의 상처를 덧내거나 곪아터지게 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글을 쓴다. 그때는 욕을 글로 바꾸었지만 지금은 글을 욕이 될 수 있는데도 글을 쓴다. 그날처럼 내 글을 기다리는 이도 없고 누군가의 마음을 갈음하지도 못하는데 왜 글을 쓸까. 누구나 쓸 수 있는 별 것 아닌 글, 치워내며 안 읽어도 그만인 글, 서 말 글자를 아무리 꿰어봐도 보배는커녕 끄덕임을 받을 수 없는 글인데 왜 쓰려하는가. 공허함을 채우고 나를 돋우려는 이기심인가. 깊은 글숨을 내뱉는다. 알려고 하지말자. 글을 더 쓰면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
글이 떼로 몰려다니며 떼를 쓰는 세상이다. 글쓴이를 모르는 글까지 흩뿌려져 온통 글투성이다. 말보다 글이 쉽고,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빠른 시대다. 아무 데서고 어느 때나, 누구와도 순식간에 글이 오간다. 글을 퍼나르고 퍼뜨린다. 넘치는 글에 치이거나 눌려서 걷어내고 거른다. 누군가 쓴 글을 아무나 사용한다. 내가 지워도 네가 가진다. 네 글을 훔쳐도 너는 모른다. 한 줄 글이 사람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어지럽힌다. 줄임말과 신조어가 버젓이 글 행세를 하고 문장부호와 이모티콘, 특수문자에 글이 밀려나기도 한다.
아무려면 글탓보다는 글탈이 없도록 글끈을 바짝 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