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떡갈나무 / 정태헌

 

 

저게 누구인가. 도심 물결 속에 도드라진 뒷모습에 눈길이 쏠린다. 작달막한 키, 빛바랜 먹물 장삼, 조붓한 어깨, 결곡한 목덜미, 음전한 걸음새, 청정한 뒤태로 봐 비구니이다. 뒤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아슴아슴한 기억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날,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고 의아했다. 겉봉엔 ‘圓光 合掌.’ 혹시, 생각 끝에 차츰 소선素善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소선이다. 법명法名이 원광이었구나. 참으로 오랜만의 편지였다. 일이 년도 아닌 수십년 만의 편지임에랴. 어떻게 거처를 알았을까. 입때껏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는가 보다.

한지에 꾹꾹 눌러 단정히 쓴 짧은 전언. 순천 조계산 서쪽 기슭 절에서 동안거 해제 후 만행을 떠나며 몇 자 올린다는 것,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모아져 그날 약속을 지킨다는 게 전부다. 행간엔 산바람이 불고, 흰 구름이 흐르며, 구국구국 멧비둘기 울어 예는, 아리아리한 목탁 소리도 그 속에 맴돌고, 돌돌돌 골짝 울리는 계류마저 귀에 잡힌다.

“왜 스님이 되려 하지?”

“….”

오래전, 산사에서 나눈 몇 마디가 아직도 가슴에 물살 진다. 산죽 수런대는 소리 내내 끊이질 않던, 달빛 교교한 밤이었지. 채근에 관자놀이를 움씰거리며 소선은 침을 연달아 삼킬 뿐이었다.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이도 숨만 크게 들이쉴 뿐이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면 소재지 고등학교로 초임 발령이 났다. 첫 수업은 남녀 공학인 삼 학년 교실. 소선을 처음 본 것도 그날이었다. 그는 학급 반장이었다. 수업 중 소설 작품(김동리의 <등신불>이었던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의 사성제四聖諦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가운데 둘째 줄에 앉은 소선, 눈을 초롱초롱히 뜨고 바짝 다가앉아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책상에 웬 편지봉투가 놓여 있었다. 우표도 발신자도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살짝 놓고 간 게 분명했다. 당시 여학생들의 흔한 행동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읽고 나서 가슴이 철렁했다.

“출가하려 합니다. 예전부터 뜻을 두고 준비했습니다. 마지막 정리를 하며 부모님과 선생님께 편지를 남깁니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충청도 쪽으로 갑니다.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찾으려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움이라니 무슨 도움이란 말인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수업 중에도 온통 편지 내용에만 마음이 쏠렸다. 쉬는 시간이 되어 교무실에 들어서니 중씰한 여인네 한 분이 생맥 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느 선생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아 귀를 기울이니 소선의 어머니였다. 간 곳을 몰라 찾을 수가 없다며 안절부절못하는 소선 어머니, 왼손엔 편지 봉투가, 오른손엔 휴지처럼 구겨진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이를 어쩐담. 어디로 가서 찾아야할까.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소리바람 치던 토요일, 일찌감치 학교 문을 나섰다. 면식이 있는 스님을 통해 갈 만한 곳을 수소문한 끝에 충청도 깊숙한 곳에 있는 어느 산사를 귀띔 받았다. 물어물어 충청도 덕숭산 자락 산사 일주문에 도착했을 때는 산그늘이 내린 뒤였다. 산 위에는 비구들이 거처하는 절, 서쪽엔 비구니들만이 참선 정진하는 총림. 천만다행으로 소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노스님의 배려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미륵 석불 입상 앞에서 소선과 마주했을 때는 땅거미가 짙어서 소선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요사채에서 밤이 이슥토록 마주했다. 설득도 해보고 차츰 을러도 보았지만 묵묵부답이요 요지부동, 밤바람에 수런대는 산죽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저 보았다는 말씀은….”

되레 소선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으며 내게 다짐을 두었다. 짐작은 했지마는, 생각보다 뜻이 강했고 마음 또한 깊었다. 그렇다고 손목 비틀어 끌고 갈 수도 없는 일.

생각 끝에

“대신….”

시종 고개 떨구고 있던 소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눈을 들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려는 말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밤이 깊어 도리없이 그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 때가 되면 편지하여라.”

소선이 처소로 돌아간 후, 자지러지게 환한 밤이 이울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교교한 달빛이 지창에 젖어 불을 밝히지 않아도 방안은 훤했다. 저편에서 번져오는 풍경 소리는 고승의 선문답만 같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근원적인 화두에 매달려 밤새 내내 뒤척였다.

달빛 여위어 가는 새벽녘, 살그미 방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차가운 산바람이 쏴 얼굴을 스치며 정신을 화들짝 들게 했다. 발끝에 밟히는 절간의 어둠을 헤치며 계단을 내려오다 노스님과 맞닥뜨렸다.

“아침 공양이나 하고 가시지요.”

묵례로 대신하고 계단을 내리 밟았다. 먼발치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노 스님의 말씀이 등 뒤에서 맴돌았다. 안개에 실려 온 새벽 목어木魚 소리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전날 무심코 지나쳤던 회갈색 떡갈나무가 눈을 비비며 아침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떡갈나무에 다짐과 약속을 새겨두고 홀홀히 하산했다.

소선의 출가가 초봄이었는데, 뒤늦게 다시 초봄을 맞아 편지 연락을 왔다. 수십 년, 왜 이토록 편지가 늦었을까. 아니 어쩌면 빠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산사에서 다짐을 착실히 지킨 이는 소선이고, 그 약속을 간직한 채 그저 세월을 건너온 이는 그 선생이었네. 앙가슴에 바람 한 자락 서늘히 스쳐 간다. 무욕의 바랑, 저게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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