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고 싶은 일 / 허창옥
수성못가의 오래된 레스토랑 ‘호반’에 앉아서 블랙러시안 한 잔 마시고 싶다. 바람에 나뭇잎들은 이리저리 춤을 추고, 못의 수면은 해거름의 빛살을 받아 물결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 가고 싶다.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1970년대의 흘러간 팝송을 듣고 있겠다. 그 사람들과 따로 앉아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으면 좋겠다. 오래 앉아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밤이 깊어지면 내 침묵도 깊어져서 마침내 나는 평화로워지겠지. 그렇게 오래 앉아 있다가 문득 그 집에서 일하는 착한 젊은이가 하품을 하는 걸 보게 되면 미안한 마음이 되어서 일어나야지. 그 총각 혹은 처녀에게도 내일의 일이 있고 내게도 내일 또 할 일이 있다. 참 그러고 싶은데, 진심으로 그리하고 싶은데 이 시간 나는 일터에서 일을 하는 중이고 잠깐 틈이 나서 이리도 철없이 헛생각을 한다.
지례예술촌,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가고 싶어서 검색을 여러 번 해보았다. 오늘 거기 빈방이 많이 보인다. ‘예매가능’을 누르고 싶다. 고택의 사랑방에 들어서 책을 일거나 그 주변을 산책하고 싶다. 물론 가본 적이 없기에 주변의 풍광이 어떤지도 모른다. 해가 저물도록 책을 읽으면 배가 부르겠다. 앉아서 읽다가 허리가 아프면 눕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어치우고 싶다.
아침이나 초저녁에는 설렁설렁 걸어 다니며 가슴을 넓게 펴고 맑은 공기를 허파 가득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면 정말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저녁밥 먹고 휴게실(이런 게 있으려나)에 앉아서 속 뒤집히는 뉴스 따위는 잊어버리고, 연속극을 보다가 밤이 늦으면 방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쏟아내는 말들로 글을 쓰면 되겠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 남은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호를 그으며 감사기도를 올리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잠이 맛있겠다. 하지만 나는 세상 걱정, 세태 근심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정작 세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면서 마음만 볶아댄다.
거기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얼마 전에 그런 걸 알 만한 지인에게 물어보니 전북 김제시에 가면 지평선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전북 김제시, 낯설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지. 언제 꼭 가보고 말테다. 거기 가서 무엇을 하랴. 그냥 멍하니 앉아있다 오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머릿속을 비우고 소소한 근심걱정 내려놓고(정말 큰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기에 가지 못한다. 걱정거리는 꼭 작은 것이어야 한다.) 멍하니, 백치처럼, 전혀 심각하지 않게 앉아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저 하나의 풍경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그것이 행복이라고 노승이 ‘꾸삐씨’에게 말했다. 그게 과연 행복일지 어떨지 모르지만 어딘가 지평선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면 참 아름다울 것 같기는 하다. 지평선 대신 나는 의자에 앉아서 건너편 주유소에 드나드는 자동차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거나, 고택의 조용한 방에서 책을 읽거나, 지평선에 앉아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일들을 당장 하지 못한다고 슬프거나 불편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넋두리를 늘어놓는가. 이런 심경의 저변에는 이 사소한 바램들을 이루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나의 배고픔 갗은 것이 뱃속에서 꾸르륵 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꾸르륵 대는 소리가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라 지난 세월 내 삶을 관통해 왔고, 앞으로의 삶도 지배할 것이란 확신마저 생긴다. 하여 내 넋두리는 당위성을 얻는다. 현재의 삶이 결코 내가 원했던 혹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요지부동, 어찌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사소하나 간절한 바램들은 그러니까 꼭 말 그대로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내가 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은유 또는 표상이라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살지 못하는 삶의 사이에는 꽤 폭이 넓은 괴리가 있다. 나는 그 벌어져있음을 좁히거나 뛰어넘을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다. 예컨대 김제시에 가고 싶은데 당장은 고사하고 나중에, 이를테면 일 년 후에도 나는 시외버스를 타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기본적으로 내게는 행위가 결여되어있다. 그런 채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다면 살아보지 못했으나 그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