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서점 / 최미아
‘손잡이를 힘껏 돌리시면 문이 열립니다. 어려우시면 노크를 해주세요.’
문기척을 해도 조용하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는지 연락처가 있다. 한 시간 뒤로 온다고 들어가 있으란다. 혼자 있을 수 있다니,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묵직한 철문이 철컥 열린다. 창으로 햇빛이 비쳐들어 실내가 환하다. 상아색 해먹을 중심으로 찬장과 원목책장, 자개문갑, 책상 등이 잇대어 있다. 중고품으로 꾸렸다더니 책만 들어내면 중고가구점이겠다. 여기는 책이 눕고 서고 기대어 노닐고 있는 ‘북극서점’이다.
예전에는 우리 아파트 상가에도 서점이 있었다. 얘들하고 그림책도 보고, 좋아하는 작가 신간도 기다렸다 샀다. 버스 기다리다가도, 시장 가다가도 잠깐씩 들러 책을 보곤 했다. 어느 날 서점이 치킨 집으로 바뀌었다. 1층에 있던 서점은 지하로 내려갔다. 서점은 지하에서도 오래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줄어들던 동네책방이 요즘 다시 늘어나는 추세란다. 카페를 겸하거나 문구류나 소품 등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여행하면서 동네책방을 들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부산, 제주, 파주로 마음이 내달았다.
오년 전 집을 줄여서 이사하느라 책을 정리했다. 남편은 우리 집이 책만 없으면 모델하우스처럼 될 거라 믿었다. 책 다 버리고 집을 깔끔하게 만들어봐? 계획은 야심찼지만 버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선별하고 남은 책을 남편 눈치 보면서 끌어안고 이사를 했다. 넓은 집에서는 줄 세워 놓던 책장이었는데 들어갈 곳이 없었다. 결국 책장을 안방과 아들 방으로 나누어 들였다. 모델하우스는커녕 침실도 서재도 아닌 엉거주춤한 공간이 되었다. 책은 그만 사고 빌려보리라 다짐했다. 그 뒤부터 서점에 가서 신간 둘러보고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이제는 시립도서관이 내 책방이고, 도서관 책이 내 책이다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을 읽었다. 사계절출판사가 창립 40주년 기념으로 만든 책이다. 전국 스물세 곳 책방지기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웅숭깊다. 북극서점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웠다. 독서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이 앉아 있다. 주인이 가장 아끼는 책일까. 주인은 슬로보트다. 초등 교사를 그만 두고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서점을 열었다. 음반까지 낸 가수이고 문화기획자이기도 하다. 책 《고르고르 인생관》 까지 냈다. 자세히 보니 코너마다 여행, 철학, 건축, 환경, 소설 등이 질서정연하다. 슬로보트님이 간택한 책들이겠지. 한쪽은 갤러리 북극홀이다. 작가와의 만남이나 독서모임을 하는 곳이겠다. 이제부터 한 시간 동안 여기는 내 세상이다. 주인은 혼자 춤도 춘다는데 나도 춤이라도 추워볼까.
나도 한때 이런 공간을 꿈꾼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카페가 유행하지 않던 때였다. 북 카페 차려서 책보고 노는 게 꿈이었다. 하마터면 꿈이 이루어질 뻔했다. 분양 팀의 장밋빛 말만 듣고 대출을 받아 상가를 덜컥 계약했다. 건물은 완공되었는데 세입자가 들어오질 않았다. 부동산에 물어보니 ‘뜬자리’였다. 사람이 다니는 길목이어야 하는데 끝나는 지점이니 누가 들어오겠냐고 했다. 꼬박꼬박 대출 이자는 나갔다. 부동산에 생무지였던 값을 톡톡히 치르면서 뜬자리 골은 깊어만 갔다. 남편에게 슬쩍 집에 있는 책으로 북카페를 차리면 어떨까 물었다. 남편은 책을 돌보듯 하니 찬성할 줄 알았는데 반대했다. 부동산 전문가처럼 카페는 안 되고 위층에 요양원이 있으니 죽집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평소에 호박죽, 팥죽, 전복죽을 시리즈로 대령한 결과였다. 남편은 내 죽 실력만 알았지 죽집에 관심 없음은 몰랐다. 가게 잘못 열었다가 수천 까먹기는 식은 죽 먹기라고 얼버무렸다. 결국 북 카페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서점에다 어떻게 해먹 놓을 생각을 했을까. 나무에 매단 것만 보았지 바닥에 있는 해먹은 처음이다. 주인이 있다면 쑥스러운 일이겠지만 아무도 없으니 얼른 올라가 보자. 한손에 들어오는 카뮈의 《결혼》을 들고 해먹 위로 올라가 누웠다. 생각보다 편하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는다. 책방에서 홀로 놀기, 감미롭다. 여기를 종일 빌릴 수도 있다니 날씨 좋은 날 북파티를 하면 좋겠다. 해먹에 눕거나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책 보고 음악 듣고 차 마시고… 상상이 날개를 다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주인은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빨리 온 건가. 내려오려는데 쉽지 않다. 해먹이 뒤집어지려 한다. 어디서든 내려오기가 더 힘들구나 생각한 순간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카펫이 깔려 있지 않았다면 코 깨질 뻔했다. 밖이 조용하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사람이었나.
머리를 비다듬고 의자에 얌전하게 앉았다. 주인이 들어와서 보아도 우아한 자세다. 하지만 주인은 오지 않고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도 넘어가고 갈수록 춥다. 북극이 이만큼 추울까 싶다. 책값을 보내고 《결혼》을 들고 나왔다. 서점 앞 굴포천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