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죽조개 맛이 깊어지면, 서쪽 바닷가 동백마을에 가리라. 마을 앞 고두섬 주변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갯벌에 숨구멍이 보이고 그곳을 호미로 깊숙이 파내 보리다. 부지런히 뻘 속을 뒤지면 봄볕 품은 동죽이 물총을 쏘아대며 손에 잡힐 것이다. 혹여 귀한 백합조개라도 찾는다면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소리쳐보리라. 심봤다!

걸어가도 좋으리라. 느직한 걸음걸이에 맞춰가는 길이니 지나치는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넣기에 좋으리라. 드문드문 다니는 군내버스 시간과 바다의 물때가 다른 날에는 천천히 걸어서 동백마을로 들어가리라. 배낭에 기다란 물장화는 개켜 챙기고 김 올린 모시송편을 찬합에 넣고 보온병에 팔팔 끓인 커피물을 내려 등에 짊어져야지. 자동차 길은 산허리를 휘돌아가니 가로지르는 샛길로 발길이 빠질 것이다. 밭둑길을 걷노라면 앞서가는 여자들 사이를 바싹 붙어 종종걸음 치는 어린아이를 만날지도 모른다. 곁으로 다가가 들어보면 그중 나이든 이는 우스갯소리로 목청을 돋우고 돌부리에 넘어질세라 연신 아이 발밑을 살피는 젊은 여인이 뒤따를 것이다. 앞뒤로 든든하게 지켜주는 이들과 함께 걷노라면 가풀막도 걱정이 없을 것이고 눈앞을 가로막는 분패치는 날이라도 봄날 종달새 날아오르듯 발끝부터 경쾌해지겠지. 땀이 솟는 허우재 고갯길을 오르거들랑 바위에 걸터앉아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부어 호호 불어가며 마셔보리라. 지나던 바람마저도 진한 커피향에 주변을 맴돌지도 모를 일이다.

갯벌에서 캐어 낸 조개가 보따리에 가득 차면 어른들은 어깨에 메고 후적후적 평지를 걷듯 갯벌을 빠져나가고, 작은 호미를 양손에 들고 뒤따르던 아이는 여전히 뻘에 빠진 발을 빼내느라 끙끙대고 있을 것이다. 갯골에 물이 차면 큰일이라며 재촉하는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펄떡이는 핏줄 따라 뻘흙이 젖은 바지를 타고 윗도리까지 올라가겠지. 동백나무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떠서 아이를 씻기는 여인의 손길에 투박한 다정함이 묻어날 것이다. 우윳빛 바닷물을 내품는 조개 속살을 까서 부뚜막 소주병에 담긴 막걸리 식초를 부어 잔파는 잘게 썰고 깨소금, 마늘, 고춧가루와 버무린 조개회무침을 숟가락으로 푹푹 떠서 먹어보리라. 몸속에 새겨 있던 새콤달콤한 기억도 되살아나 입맛을 당길 것이다. 곁들여지던 헐렁한 농담에 등잔불조차 좌우로 흔들거릴 것이고 추억은 목젖을 거쳐 심장으로 들어가 새빨간 도장자국처럼 깊숙이 박히리라.

서해안 주꾸미는 불룩하게 알을 품고 비닐하우스 미나리가 겨우내 올린 키 자랑을 할 때면 백수해안도로 옆 동백마을로 가리라. 밀가루로 박박 씻은 주꾸미와 긴 뿌리 냉이를 다듬어 끓인 육수에 살짝 데친 후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양배추와 양파를 넉넉히 썰고 매콤한 양념을 한데 섞어 볶아 내어도 맛나겠지. 아삭하고 향긋한 봄맛에 항아리에서 막 떠낸 막걸리 한 사발이 찌릿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숨죽였던 춘심春心이 화들짝 일어날 것이다.

차로 가도 좋으리라. 산허리를 구불구불 돌고 돌아 아래로 마을이 보이거들랑 비탈길로 내려가 보리라. 사람들은 내리막을 싫어한다지만 목줄을 타고 내려가는 음식물 덕분에 피돌기로 심장은 뛸 것이고 계곡 아래로 흐르는 물길이 있어야 구르던 돌은 너른 바다에 다다를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는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그 짐을 평지에 부려 자유를 찾으리라. 부채꼴처럼 넓어지는 동백마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영화 <마파도> 배우들이 묵었던 집도 구경하고 대밭과 돌담을 거느린 옛길을 유유자적 걸을 수 있으며 배암골댁의 누렁이와도 눈인사를 나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자동차의 빠른 속도로만 내려간다면 오래되고 하찮은 것들은 스쳐 지나칠지도 모른다. 물동이에서 뒷골로 떨어지던 차가운 샘물 맛과 팥죽 끓이던 마당을 주인인 양 차지한 뽀얀 냉이꽃, 유년 시절 조개껍데기 올려놓고 소꿉놀이하던 집채만 한 고인돌 바위를 놓치고 말 것이다. 잠시라도 동백경로당 앞 공터에 서성거린다면 눈앞에 누렁이가 우렁차게 짖겠지만 막상 다가서면 쪼르르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덩칫값도 못하는 녀석이므로 무시해도 좋으리라. 외로운 마음자락 숨기며 자동차에 짐을 싣고 떠난 이들을 기다리느라 지쳤을 터이니 이름 불러 다독여주면 족하리라. 누군가 따주던 아삭하고 달디단 단감 맛이 불현듯 떠올라 앙상해진 감나무 가지에 울컥해지거든 얼른 눈길을 먼 바다로 돌리며 황급히 마을을 벗어나야 할 터이다.

서쪽 바다에 웅어 새끼가 그물에 걸려 나오기 시작하면 백암리에서 으뜸으로 치고 동백구미라 불리던 동백마을에 가리라. 양푼이에 기름진 웅어를 뼈째 썰어 넣고 땅 속에 묻어두었던 무를 기다랗게 채쳐서 같이 버무려 내어놓는 이 있으리라. 아궁이 잔불에 석쇠 얹어 구우면 입안을 감도는 고소한 맛이 봄을 재촉해 부를 것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해안 길로 달려도 좋으리라. 아랫길에서 동백마을을 가로질러 오르면 춘설 맞은 댓잎끼리 부딪쳐 찬바람을 일으키고 살얼음 낀 샘물에는 조롱박 하나 물결 따라 맴도는데 허벅지는 터질 듯 쪼여오고 가쁜 숨소리에 셔츠는 촉촉하게 물기가 배어날 것이다. 살다 보면 언제 한번 손쉽게 꼭대기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초고속으로 오를 수 있는 승강기는 항상 비껴 나 있었고 파도치는 바다를 한달음에 건너뛸 수 있는 케이블카는 다른 고을 얘기처럼 들려왔었다. 그저 내 눈길과 속도에 맞추어 걸어왔으나 가끔은 자전거라도 얻어 탈 수 있으면 족한 삶이리라. 서서히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동백마을이 휜히 내려다보이는 넓고 편편한 아스팔트 길이 기다릴 것이다. 아득해 보이던 길도 결국엔 끝에 닿기 마련이다.

노을 진 바다를 마당으로 삼고 집들이 계단을 만드는 마을. 나란히 곁으로 앉은 집보다 오선지 위 음표처럼 윗집 옹벽이 아랫집 벽이 되는 동네가 보이거들랑 제 집 향해 뛰어가는 어린애들처럼 풀숲을 내달려 보리라. 그리고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손짓하는 외갓집으로 곧장 들어갈 것이다. 등 굽은 외할머니가 흙 묻은 손에 푸릇한 달래 한 움큼을 쥐고 텃밭에서 한걸음에 달려오신다면, 군데군데 흙덩이가 떨어져 나간 토방처럼 사그라들어가는 품이지만 뛰어가 안겨보리라. 이미 많은 것을 주었는데도 당신의 허리춤 풀어 쥐여주는 꼬깃꼬깃한 지폐에 손사래를 칠 것이다. 기억의 둥지로 돌아왔으니 등은 벽에 기대고 지친 두 다리는 마음껏 뻗어보리라.

어떤 방법으로 찾아간들 어떠리. 인생길은 언제나 정해진 길로만 가지 않거늘. 동백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발길 닿는 대로 배회하는 여행길이어도 좋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걷는 산책길이어도 좋을 것이다. 어느 날 동백마을에 당도하거든 짜디짠 바닷바람을 품어 안은 초록 잎 사이로 핏빛처럼 붉은 꽃을 언제 또다시 피우려는지 짯짯한 동백나무에게 물어보고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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