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역 이야기 / 임경희 - 제8회 철도문학상 대상
이제 주산역에는 기차가 멈추어 서지 않는다.
장항선의 기차들은 이 역을 빠르게 스쳐 달려간다. 주산역은 장항선의 복선화, 개량화 흐름 속에서 오래전 폐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기차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오늘 나의 여행지는 주산역이다. 주산역을 오기 위해서 웅천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왔다. 벼르고 별러서 작정하고 도착한 곳이다. 오는 내내 만감이 교차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 흘러간 주산역 터에 막상 서보니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오른다. 인생의 가슴 저리는 사연이 있었고,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곳이다.
병풍 같은 산기슭 앞 위치했던 주산역은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주산역은 비둘기호 기차만 오가는 간이역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영화세트장 같은 아주 작은 역사가 있었다. 하얀 역명판에는 까만 글씨로 <간치-주산-판교> 수줍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기찻길 바로 옆에 그 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높은 방음 가림막 설치로 차단된 주산농업고등학교다. 세월은 학교 이름도 변경시켰다. 주산산업고등학교라니 낯설기만 하다. 변해버린 곳에 그대로 남아 나를 맞아주고 있는 것은 아름드리 벚나무와 뒤쪽 산기슭으로 구불구불 지나가는 S자형 철로뿐이다.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여전히 아름다운 장항선의 곡선이다. 텅 빈 선로 위에 정오의 햇살이 반짝이며 빛난다. 불어오는 산바람에 만개한 벚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벚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리며 속삭인다.
“이제야 왔구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얗게 길 위로 떨어져 소복소복 포개지는 얇은 꽃잎들은 서럽도록 아름답다.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인생도 흩날리는 꽃잎 같아서 순간의 반짝임과 잠깐 숨 돌리는 사이 덧없이 사라진다. 부재(不在)는 추억을 낳는다. 기억의 저편에서 그해 비둘기호 열차가 서서히 주산역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40여 년 전 봄날, 나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산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비탈진 길을 내려가자마자 곧바로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게 되어서 놀랐다. 이렇게 기차역과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다니. 조심스럽게 들어선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들이 있는 축사를 보고 또 놀랐다. 그뿐이랴. 놀라움은 계속 이어졌다.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서 나는 유일한 여교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여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학교 담벼락 밑에 있는 작은 방을 세 얻어 살았다. 그 방의 창문은 철길 쪽으로 나 있어서 오고 가는 기차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밤 기차는 환한 불빛을 밝히며 꿈처럼 그 창을 오고 갔다. 그럴 때면 창문은 지진이 난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말 외로웠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시간을 빼고 나면 언제나 혼자였다. 갑자기 바뀐 환경과 상황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흡사 조그만 종지 그릇에 고여있는 물 같이 느껴졌다. 숨이 턱턱 막혔다. 기차만이 함께 있었다. 수업하다가도 기차가 지나가면 기적소리 때문에 잠깐씩 멈추어야만 했다. 기차는 학교 운동장을 따라 길게 지나갔다.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보일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이곳 주민들에게 기차는 시계였다.
언제부터인가 기차를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달려가서 훌쩍 기차를 타고 확 떠나버리고 싶었다. 운동장만 달려나가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주산역은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시절 내게 기차는 떠남이요, 탈출이었다. 기차만 보면 가슴이 일렁였다.
신은 평화로운 일상을 무료하다고 툴툴거리는 내가 한심했던 것인가. 일요일, 일직 근무를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장맛비가 쏟아졌다. 이어 기차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비를 흠뻑 맞은 젊은 남자가 당직실에 들어섰다.
“죄송한데요. 비가 갑자기 너무 많이 와서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공룡같이 커다란 텅 빈 학교에 들어선 낯선 남자에게 앉으라고 했다. 비를 닦아낼 수건도 건네고, 따뜻한 차도 끓여 주었다. 그뿐인가. 그가 갈 때는 우산도 빌려주었다. 분명 좀 더 신중했 - 4 - 어야 할 만남이었지만 그때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거침없이 풍덩 뛰어들었다. 인천에 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장항선 기차를 타고 오갔다. 다음 해, 그와 결혼을 했다. 한 달 뒤, 가난한 남자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떠났다. 나는 주산에서 혼자서 아기를 낳았다.
백일도 되지 않은 아기를 품에 안고 대전으로 이임하던 날, 학생들은 열차에 매달리면서 울었다. 장날이라서 열차 안의 할머니들은 열차 창문을 두드리며 울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아이구, 학상들이 왜들 저런댜. 누가 죽었는갑다.”
어린 아들은 기차를 정말 좋아했다. ‘엄마’에 이어 두 번째로 익혔던 단어가 ‘긍긍’이다. 아들의 긍긍은 기차를 의미한다. 이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기차요, 그림을 그려도 기차만 그려달라고 했다. 집 베란다에는 색종이로 오려 붙인 종이 기차가 가득했다. 분명 기적소리와 함께 살았던 주산의 영향 탓이리라. 이렇게 기차를 좋아하니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비둘기호를 타러 다녔다. 뒤뚱뒤뚱 임산부의 몸으로도 열심히 다녔다. 아들은 달리는 기차의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기차는 아들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아들의 꿈은 철도기관사였다.
한동안 주말마다 찾아가던 두계역이다. 서대전역에서 하행선으로 내려가 맞이방 의자에 앉아서 오가는 기차를 구경한 뒤, 다시 상행선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딱 적합했다. 이런 우리 모자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상행선 기차를 타러 나가는데 개찰하던 역무원 아저씨가 무슨 일로 주말마다 오고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하긴 사연 많은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그냥 아들이 기차를 좋아해서 하는 여행이라고 대답하니 선하게 생긴 그는 자신의 모자를 벗어서 아들에게 씌운 다음 높이 안아 올렸다. 아들은 신이 나서 활짝 웃었다.
“관이라고 했지. 철도기관사 보다 기차 타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가 돌아왔다. 이제 우리 가족은 행복할 일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변했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었고, 술과 도박에 손대기 시작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귀가는 매일 늦어졌고 외박이 늘어났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불행은 이렇게 찾아왔다.
결정적인 파국은 초등학생 아들의 생일 전날 밤에 왔다. 집에는 미역국 냄새가 가득했다. 밤늦게 들어온 남편은 ‘여자’가 있다고 말했다. 아이가 3명 있는 이혼녀란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날마다 울부짖고 싸웠다. 그러다가 싸움 소리에 뛰어나와 울고 서 있던 아들이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지 아래로 새어 나오던 소변은 거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아들과 딸은 서럽게 울었다. 지옥 같은 이 광경을 보면서 전쟁을 끝내야 함을 깨달았다.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마침내 이혼했다. 삶 전체가 무너지는 참혹한 과정을 겪었지만 살아내야 했다. 어린 두 아이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진 가장이 되었다.
직장동료들은 나를 여전사라고 했다. 집안일과 직장 일로 시간은 언제나 모자랐지만 치열하게 일했다. 승진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러나 굴곡진 삶의 무게는 감당해내기가 무거웠던지 어느 날 갑자기 암 환자가 되고 말았다. 몇 차례의 암 수술은 신체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신산한 세월의 흔적이 훈장처럼 새겨졌다.
인생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삶이란 느닷없이 상처가 생기고,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이어진다.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병가도 쓰고 휴직도 하면서 차츰 마음의 화평을 찾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벌어진 일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고달픔 속에도 숨겨진 희망이 있었다. 결박하고 있던 번뇌를 하나씩 풀어 내려놓으며 마음을 비워갔다. 아픔과 흔들림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다. 마음은 고요 속으로 침잠했다.
이순을 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기뻤던 소식은 딸의 외무고시 합격이다. 시험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딸의 기다림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5년을 노심초사 기다렸다. 신림동 고시촌의 어두컴컴한 작 은 방, 딸아이를 보고 내려오는 늦은 밤의 붐비던 무궁화 기차, 열차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흔들리며 내려올 때의 막막함…. 그 길고 고단했던 시간도 추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딸은 그토록 간절하게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외교관이 되어서 외국으로 떠났다. 기차를 유난하게 좋아했던 아들은 철도기관사가 아닌 수의연구사가 되었다. 두계역 역무원 아저씨 말을 가슴에 새겼던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우진이를 낳아 나에게 할머니라는 새로운 호칭을 달아주었다.
끝이다. 끝.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해낸 거 같았다. 기꺼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젊고 건강한 교사들에게 막중한 역할을 인계하고 교단을 내려왔다. 이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나는 장항선의 폐역, 주산역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이곳에 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던 걸까.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아련하게 퇴색시키는 힘이 있다.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오랫동안 미루기만 하고 밀려두던 숙제를 비로소 끝마친 기분이다. 털어버리고 다 훌훌 털어버려서 홀가분하다. 아픔을 추억으로 돌리고 주산역을 떠나 기차에 올랐다.
추억여행 돌아오는 길, 열차는 좌우로 논밭이 펼쳐진 레일 위를 달린다. 기차만큼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산을 만나면 자연스레 돌아가고, 강을 만나면 흔쾌히 굽어 달려간다. 철길 주변에 세워진 초록의 나뭇잎들이 창으로 가득하게 밀려온다. 문득 기차를 유난히 좋아하던 아들이 생각난다. 아무래도 다음엔 우진이네랑 함께 서해금빛열차를 타고 기차여행을 떠나보자고 해야겠다.
무심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한없이 평화롭다. 차가 주기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그 옛날 굽이굽이 열차의 허리를 꺾고 달리든 길고 긴 장항선 역이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주산, 간치, 웅천, 남포, 대천, 주교, 주포, 진죽, 원죽, 광천, 신곡, 신성, 홍성, 화양, 삽교, 오가, 예산, 신례원, 선장, 학성, 신창, 온양온천, 모산, 천안……. 어느 순간, 스스로 밀려오는 잠 속으로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