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뿌리 / 제은숙 - 2023년 제13회 천강문학상 대상
잠잠한 호수를 내려다본다.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처럼 물 한 그루가 천천히 흔들린다. 진흙 깊숙이 발을 걸고 굵은 둥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지 끝 어린 물 잎사귀들만 바람 소리에 화답한다. 저토록 푸른 물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쉽사리 속내를 보인 적이 없기에 겹겹의 결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깊은 바닥에 어떤 마음으로 가라앉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얼마나 웅숭깊이 뿌리내려야 저렇듯 고요한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대지 속에 물의 씨앗이 잠들어 있었다. 껍질이 열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물길을 내고 굽이쳐 흘러 금세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었을 터. 어쩔 수 없이 삼킨 무명들과 어쩌지 못해 뛰어든 이름들을 품으며 살아온 시간. 호수의 생이란 그저 마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땅 아래로 닻을 내리고 함구하는 것이리라. 스미고 파고들어 어딘가로 뻗어 있을 물의 뿌리를 생각한다. 앉은 자리를 원망하지 않았으나 흐르지 못하는 고통은 묵직한 침묵이 되어 내리박혔다. 물면에 비친 산 그림자가 파르르 떨릴 뿐 물은 아무런 말이 없다.
먼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물을 알고 있다. 바다로 향하는 길가 외딴 곳에 작은 샘터가 있었다. 차디찬 단물이 솟았기에 긴 세월 마을의 식수원이었다가 내가 자랄 때는 목을 축이거나 간꽃을 씻어내는 쉼터로 쓰였다. 늘 축축한 이끼가 깔려 있던 곳. 오래된 책장을 넘기거나 흙을 뒤집을 때 그 냄새가 아득히 밀려오지만 실존하는 냄새라기보다 기억에 밴 내음이어서 무엇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입을 갖다 대어 물을 마셨던 행위는 고귀한 존재 앞에 예를 갖춘 제사장의 모습과 같았으리라. 찾는 이가 사라진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을까. 곁뿌리로 전락하여 사그라진 밑동만 남았겠으나 박힌 뿌리는 여전히 굳건하여 아직도 신령한 물 알갱이를 간직하고 있겠지.
생은 그런 곳에서 움터야 한다.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강한 심지를 가진 모태. 혹독한 추위에도 얼지 않는 신실한 샘으로부터. 우주 만물이 아끼고 조심하여 은밀히 숨겨둔 장소에서 유리알 같은 생명이 끊임없이 솟구쳐야 한다. 어린 발등에 입을 맞추고 공손히 받들어 주는 공간에서 생명은 힘차게 발을 내딛어야 한다. 사람의 목숨도 신을 위한 축제처럼 숭배하듯 출발해야 마땅하다.
새로이 솟아난 물은 뿌리가 없기에 흐른다. 바다로 향하는 일은 그들의 숙명이므로 거부할 수 없다. 바위에 부딪히고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크고 거센 물줄기로 성장하는 여정이다. 그러나 다짜고짜 온 힘을 다해 내달린다고 모두가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않는다. 평탄한 길에 들어서면 다행이겠지만 정처 없이 헤매는 이들도 생겨난다. 바다에 닿지 못한 물줄이 낮은 땅 위에 고여 자리를 잡는다. 물은 겁내지 않고 속도를 늦추며 머무는 일에 전념한다. 단 한 가닥의 실뿌리라도 뻗기 위해 고심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 열린다. 발아래, 삶이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들어서기도 하지 않던가.
방황하지 않는 생은 없다. 뿌리가 가냘픈 청춘들은 더욱 연약해서 조그만 돌부리에도 쉽게 넘어진다. 자주 울컥거리고 오독대며 탁해지는 동안 세월은 급물살을 탄 듯 지나간다. 꿈은 까마득히 멀고 해는 저물어 울고 싶지만 흐느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어렵사리 뻗친 땅속줄기에 감자알 같은 자식들이 매달리기라도 하면 생의 추는 더욱 무거워진다. 정착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절실해져서 짙푸른 바다는 포기하고 영원히 잊어버린다. 청춘은 금이 가고 닳아서 부서졌다. 세파에 맞서고 때로는 패배하여 찬연했던 빛은 간데없다. 그러나 새롭게 돋아난 의미와 가치들로 상처는 명예로워진다. 굽은 뿌리가 억세고 질겨지는 동안 비로소 물낯은 평온해지는 것이리라.
말라버린 우물 안을 본 적이 있는가. 원천이 있으나 솟지 못하는 물이다.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물은 스스로를 가두고 천천히 낡아간다. 텅 빈 몸체가 겉으로는 완전히 망가진 생인 듯 보이지만 메마른 밑바닥 깊숙한 곳은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일지도 모른다. 고집스레 뿌리내렸던 상흔으로 바다를 보지 않고도 대양을 품는 법을 깨우친 까닭이다. 그리하여 미련 없이 타들어가 가붓이 이울 채비를 한다. 마지막 뿌리 끝에 씨앗 하나를 감추고 물 주름을 새겨 전하며 오래 버텨낸 신념과 지혜를 남긴다. 이제 물의 씨앗은 장엄한 생의 자취를 넘겨받아 제각각 삶의 길을 찾아 가게 되리라.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고 여긴 적이 있다. 누가 흔든 것이 아니라 몸의 뿌리가 얕았던 탓이다. 마음속 우물은 보이지 않는 심상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서서히 말라서 바닥을 드러냈을 때 내게서 태어난 어린 생명이 두레박을 내려 나를 길어 올렸다. 그 물로 목을 적시고 세수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씻었다. 나는 어느새 어린 날의 샘터를 찾았고 다시 맑게 차올랐다. 순수한 물 알갱이였던 기억과 눈부신 씨앗을 품었던 감각은 내 몸 안에 강고히 뻗어있는 생명의 뿌리였다.
성스러운 샘이 아니어도 된다. 만물을 간직한 씨앗이 아니라도 괜찮다. 세찬 빗줄기나 흙탕물 속에서도 목숨은 나고 이어진다. 웅덩이에 갇힌 삶도 있고 바다로 가는 유랑도 있으며 드넓은 호수에 머무르는 인생도 있는 법. 저마다 강인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안으로 끝없이 걸어 들어가면 세월의 외진 모퉁이에서 청량한 샘물로 솟아나기도 할 것이다. 비록 바다에 닿지는 못할지라도 생의 근원에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물의 뿌리가 호수를 고즈넉이 잠재우듯 몸의 뿌리가 생을 단단하게 붙들어줄 것이므로.
호수 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다. 뿌리를 내린 후에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운명이 나무를 주저앉혔다. 나무는 주어진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면 위 가지로부터 무수한 잔뿌리를 내밀어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물 또한 어쩌지 못하는 수근을 묵묵히 받들며 제 발끝에 힘을 모은다. 누군가의 삶도 가슴 한가운데로 지심至深한 뿌리를 내리는 일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