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판에 앉아 / 김서령
연신내 시장 볕 안 드는 한 구석, 좌판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곁에는 열 살짜리 새순 같은 딸을 앉혀두고 비닐봉지에 덕지덕지 싼 시장 본 물건들은 한켠에 세워두었다. 숱한 사람들이 김칫국물을 흘린 조붓한 나무 판자 아래 뺑뺑 돌아가는 동그란 비닐의자를 곁들여둔 좌판, 거기 기대앉아 느긋하게 시장 안을 둘러보며, 이렇게나 세상과 분리된 나는 이제 막 내 곁을 스치고 달아나는 30대에 대한 조사를 쓰려고 한다. 30대, 그렇다. 스물몇이었을 땐 턱없이 청춘이 괴로웠고, 어디로 한발 제겨디딜 틈조차 없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그 혼란을 타넘고 나와 비로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서른을 넘긴 두 아이의 엄미가 되어 있었다. 아이 둘을 업고 안고 쩔쩔매다 그 아이가 "엄마 죄송해요. 친구 집에서 놀다 가도 되지요?" 물어올 때쯤 되니 나도 어느덧 서른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전에는 혼자서는 이런 좌판에 퍼질러 앉을 수가 없었다. 곁에 앉은 노동자풍의 남자들이 풍기는 살냄새, 땀냄새를 역겨워했다. 더구나 뺨이 수밀도 같은 어린 딸애를 이런 지저분한 곳에 망설임 없이 앉히는 엄마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요새 나는 이런 좌판에 앉기를 즐기는 아줌마가 되었다. 이 집은 이영이와 함께 자주 온다. 별 약속도 일도 없는 오후 스웨터 하나를 덧입고 슬리퍼를 꿰신고 어슬렁어슬렁, 쩌먹을 꽈리고추 천 원어치, 고등어자반 한 손 2천5백 원, 파 한 단 5백 원, 오이 한무더기 천 원어치를 검정 비닐 '봉다리'에 담아들고 나는 좌판에 앉는다. 순전히 내 입맛의 호사를 위하여 들르는 집이다.
국수 한 그릇에 천이백 원, 김밥 한 줄에 팔백 원, 순대와 족발도 솥 안에서 김이 오르고 있다. 맞은 편 슈퍼마켓 이층 분식점은 이 집보다 값이 두 배로 비싸다.
좌판의 주인아줌마는 은은히 째보기가 있다. 윗입술이 살짝 찢어졌어도 살성이 희고 육덕이 좋고 손길이 푼푼하다. 웃는 모습에 어딘지 수줍어하는 태도도 있다. 그는 연신 김밥을 말고, 순대를 뒤적거리고, 설거지를 하고, 파를 다듬고 돈을 받느라 여념이 없다. 이 집에서 말아주는 국수가 나는 참 맛있다. 한 주일 한 군데씩 서울의 맛있는 집을 발굴, 소개하는 일을 두어 해 해왔기에 내로라하는 숙수가 내놓는 음식 맛을 모른달 수는 없다. 그러나 천이백 원짜리 이 집 국수, 미리 삶아 물을 빼뒀다가 뜨거운 멸치국물에 한번 슬쩍 헹궈주는 이 집 국수 맛도 결코 거기 뒤질 게 없다는 게 나의 소박한 입맛이다. 얹어주는 양념이라야 별것 없다. 파 몇 점과 김 부스러기 한 움큼,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주는 열무김치 몇 가닥. 이영이는 참기름을 바르고 볶은 깨를 솔솔 뿌린 김밥 한 줄을 먹는다.
먹으면서 나는 아까 비닐봉지에 넣어뒀던 책을 꺼낸다. 이영이도 헌 책방에서 사온 만화를 펼쳐든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오가는 사람 수백 명인 이런 북새통 속에서 손바닥에 알맞춤 갇히는 <창비시선>을 한 구절씩 읽어 내려가는 맛이 나는 예전부터 즐거웠다. 눈 밝은 사람이 보면 국수를 후루룩 빨아들이는 내 등 뒤로 엉거주춤한 나의 반생이 뜨듯미지근하게 드리워져 있을까.
내 손에 들린 것은 최영미의 시집이다. 책날개에 박힌 그의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은 상당히 눈길을 끈다. 시집도 미인이 써야 더욱 독자를 혹하게 하는 모양이다.
최영미가 미인인 것이야 탓할 게 없지만 그의 시보다 그의 미모를 강조하여 책을 광고하는 듯한 인상을 나는 여러 번 받았다. 예쁜 여자가 자신의 욕망과 좌절에 대해 솔직하게 써놓은 시, 확실히 상품가치가 있겠지. 그러나 맥주 광고도 아닌 책 광고에 굳이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두드러지게 키울 필요가 있었던가, 라는 게 나의 불쾌함이다. 게다가 소위 민중과 진보를 표방하는, 다들 뒤도 안 돌아보고 돈을 향해 달려가는 시절에 한두 군데쯤 순정하게 남아있어 줬으면 싶었던 출판사가 이래도 되나? 싶은 배신감 비슷한 심사를 지우기 어렵다.
온 세상이, 모든 영역이, 젊음과 미를 붙잡으려 열병을 앓고 있다. 젊다는 것도, 아름답다는 것도 분명 좋은 것임에 틀림없겠지만 젋어서 죽지 않으면 사람이란 늙는 법이고, 아름다움이야 어차피 제 눈에 안경일 터인데, 어쩌자고 모두들 이렇게 예쁜 것, 젊은 것만을 찾느라고 혈안들이 돼 있는 것이냐. 나는 실없이 좌판을 꽝꽝 친다.
내가 이미 젊은 여자가 아니고 예쁜 여자 축에도 끼기가 어려워서 질투와 시기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그래 그렇다고 치자.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어쨌든 최영미의 시는 솔직하긴 하구나. 솔직하다는 것이 정직으로 바로 이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고상한 척 굴지 않는 건 일단 맘에 든다. 그러나 이건 또 다른 기만일수 있다. 그런 의심이 뭉게뭉게 인다. 발문을 쓴 김욕택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이 짙게 배어 있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별로 피비린내가 느껴지지는 않는구나. 피비린내라면 어젯밤 아이아빠와 크게 한바탕 육박전을 벌인 내게서 더 많이 풍기겠지. 컴퓨터와 X하고 싶다, 같은 과격한 언사가 얼굴선이 이렇게 고운 여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다들 까무러친다는 건가.
물론 나 역시 시를 쓰고 싶었다. 최영미보다 거친 언어가 내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게 거친 것은 시가 되지 않는 줄 알았다. 소용돌이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고요한 날 고요하게 피워 올려야 하는 꽃송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대개 남의 글에 민망해하고 두드러기 돋아하면서 정작 시 쓰는 책상 앞엔 앉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젊음을 탕진하고 소모하고 말았다.
진달래가 이쁘다고 개나리는 안 이쁜가
내가 아는 어떤 부르주아는 연애시를 쓰려고 연애를 꿈꾸는데
행을 가른다고
고통이 분담되나
연을 바꾼다고
사랑이 속아주나…
야, 야, 이렇게 나오는 대로 지껄여도 시가 되는구나. 국수발을 빨아올리는 척 나는 이빨로 입술을 아프게 깨문다.
오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딸은 귀족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미망에서도 헤어나 허름한 좌판에 앉아있다. 곁에 앉은 사람이 먹다 남긴 김치조각을 유유히 씹으면서 끝내 시인이 될 수는 없었던 젊은 날의 끝자락을 바라본다. 마음이 미어지게 아픈 것은 욕심일 것이다. 아무와도 껴안을 듯 너그러워지는 것은 허세일 것이다. 과로의 끝같은 몸살기가 갑자기 나를 덮친다. 나는 시 대신 아이를 낳았지 않느냐!! 최영미가 곁에 있다면 김밥을 씹고 있는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이영이를 들이밀며 으르릉 거렸을까. 누가 뭐래? 홀로 머쓱해진 옷자락을 아이가 잡아당긴다. 엄마 떡볶이도 먹으면 안 돼요? 왜 안돼. 안 될리가?
나는 얼른 살성 흰 아줌마를 불러 여기 떡볶이 1인분 더 주세요. 젓가락 장단을 치듯 호기롭게 주문한다.
빨갛게 달콤하게 매웁게
이따위 시구절보다 백배는 강렬하게
쓸데없는 허세일랑 한방에 쓸어버리게
명색이 엄마라고 내 손을 잡아 쥐는 어여쁜 우리 딸의 혓바닥이 살살 녹게
아프게 괴롭게 이유도 없이 눈물나게
지독하게 맛있는 떡볶이 일인분 더 주세요
여기서 내가 퍼질러 앉아 울어버리기 전에
서른에 하마 잔치가 끝나면 어쩌냐고 대들기 전에
아무렇게나 행과 연만 바꿔놓고 각운만 대충 맞추면 시가 되냐고 악쓰기 전에
시를 저 높이 아득하게 밀어 올려놓은 놈 내려오라고 뻗대기 전에
후딱후딱 떡볶이 일인분 더 주세요!!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