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無言) / 박종숙

 

아버지는 지금도 내 가슴에 커다란 거목으로 살아 계신다.

동네 입구를 돌아서면 떡 버티고 서서 마을을 지켜주던 믿음직스러운 느티나무처럼 나를 지켜주는 절대자이시다. 비록 이 세상에 살아 계시지는 않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나를 보호하고 계신 수호신이다.

남아있는 세월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세상을 하직하면서도 많은 말을 아끼고 가셨다. 그 무언이 더 많은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철없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꿈결에 나타나 말없이 바람막이로 서 계신 아버지를 뵐 때면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딸을 몰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아버지는 췌장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임종을 앞둔 한 달 전부터 잘 잡숫던 음식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지방에서 병문안을 다니던 나는 종종 만두나 부침, 떡을 사 들고 들어갔다. 병원 밥에 싫증이 나신 아버지는 소화도 되지 않는다면서 모처럼 사들고 간 음식을 맛있게 드셨다. 그것을 볼 때면 꺼져 가는 등잔에 기름을 붓는 심정이었다. 식구들은 행여 아버지가 암이란 사실을 아실까 쉬쉬하였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절차를 그분 몰래 밟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문병을 가는 도중 만두가게를 들르고 나서 더 좋은 선물은 없을까 생각하다가 늘 일기를 쓰시던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걸 사게 되었다. 자랄 때 세밑이 되면 언제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일기장을 마련해 주시던 추억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고른 일기장을 그분의 마지막 생의 선물로 답례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건강한 사람의 행동과 사고를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크든 작든 약자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는 잔인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분의 체취가 담긴 일기장을 갖고 싶다던가, 부모사랑의 뜻을 알고 싶다는 소망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엄청난 죄를 짓고도 남는 행위인 것을 알지 못했다. 시들어 가는 생을 연명한다는 공포감은 내 안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장례 기간에도 내 호기심은 아버지의 일기장에 가 있었다. 어떤 말을 남기셨을까? 병마와 싸우던 고통을 이야기하셨을까? 죽음의 두려움을 말하셨을까? 별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는 아무런 글도 남기기 않으셨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묵묵히 가시다니. 평생 당신 곁을 지켜왔던 아내와 자식들에게 할 말이 그리도 없으시다니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하였다. 참으로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천명을 넘으면서 나는 가끔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슨 말을 남길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말, 저런 말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되면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무언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현명하시다는 생각까지 든다. 심중에 남아있는 말은 몇 날 며칠을 털어놓아도 모자라서 일종의 넋두리가 되기 쉽다. 그렇다고 크게 잘 살아온 세월도 아니면서 많은 걸 가르치려는 말도 주제넘는 일 같다 하여 아버지께서는 주저하셨으리라.

세상에는 좋은 말이 수없이 많지만 그 말이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시의적절한 말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고 중언부언 늘어놓게 되면 오히려 그 뜻을 그르칠 수도 있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言不盡意)’는 옛말처럼 상황에 맞는 말, 사람에게 알맞은 말을 남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모든 걸 감수하고 수용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삶에 초연해질 수 있는 일은 수양을 쌓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빈 일기장을 남기신 아버지의 용단은 훌륭한 선택이었음을 알게 한다. 현실에 연연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고 깨끗하게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 욕심을 버린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하루하루를 견디기도 힘이 드셨을 그분께 분별없이 일기장을 선물한 내 좁은 소견이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해 드린 처사였던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천근은 된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삶의 일부처럼 살아 계신다. 아버지의 빈 일기장은 수백 마디의 어떤 우언보다 많은 말을 대신하고 있다. 비록 모든 걸 묵묵히 안고 가셨지만 우주 속에 가득 차 있는 그분 사랑은 뜨거운 생명의 원천이 되어 내 혈관을 팽팽하게 채우고 있다. 나의 수호신이자 절대자인 아버지! 그분 앞에 서면 나는 지금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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