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행복 / 홍혜랑
초등학교 5학년 때 6·25 동란이 터졌다. 서울을 떠나 발이 닿은 피난지는 대구나 부산 같은 남쪽의 대도시가 아니라 선친의 생가가 있는 충청도 산골의 집성촌 마을이었다. 얕은 산비탈 꼭대기 집에 살고 있는 초로의 노인에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사람 모두가 목청 높여 '재동아범'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호칭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머리가 허연 그분의 거동은 언제나 내 시선을 끌었다. 노인의 아들 이름이 '재동'이라는데 의용군에 끌려가 생사를 모른다니, 그것만으로도 근심과 슬픔이 족한 노인이었다. 다행히 1년 가까운 피난생활 동안 나는 문중의 산지기인 그 노인을 부를 일이 한번도 없어서 '재동아범'이란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 없이 피난지를 떠나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반상班常의 신분에서 느끼던 야릇한 행복감은 세상을 알지 못하던 어린 나에게까지 노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놀랄 만큼 탁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흑인이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어떤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고백이 있다.
"1964를 잊을 수가 없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흑인인 나에게 판매를 거부하던 햄버거 가게에서 처음으로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게 된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1964년은 미국에서 흑인 보호법이 통과되던 해다. 하지만 흑인이 백인 가게에서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백인들의 몸속을 채우고 있는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이 소멸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 땅에 살고 있는 백인들이 유색인종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주인의식, 주류 의식은 역사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오늘의 시대사조는 '세상의 만물은 모두 자기 목적을 갖고 태어났으니 없어도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높다 낮다 등 이분법적 가치 구조는 인간의 인식 작용이 만들어낸 것이지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목청 높여 외친다. 하지만 수천 년의 인류 정신사가 그랬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도 잠시 사람들의 옷을 갈아입히는 반동의 사조에 그치고 말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흑인들이 제 돈 주고도 백인 가게에서 마음대로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없던 일이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고대 그리스만큼이나 영광을 누리고 있는 미국 땅에서 40년 전까지 법전에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도 델피의 신전 앞에는 배꼽을 의미하는 '옴파로스'라는 돌이 있다. 깎아지듯 가파른 델피의 계곡이 풍수지리로 보아 얼마나 영험한 땅인지는 모르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의 계곡에서 신탁을 받았고, 그곳이 바로 지구의 배꼽에 해당한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곧 세계의 중심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가 플라톤이 자랑한 세 가지 행복이 있다.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행복, 미개인이 아닌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행복, 속인이 아닌 철학가로 태어난 행복이다. 플라톤 당시 그리스에 살면서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운명에 감사한 사람은 플라톤 말고도 많았을 것이다. 육체적 노동은 노예들이 전담했을 테고, 철학과 예술과 학문에만 전념하던 화이트칼라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출생적 운명에 감사하는 마음은 긍정적 삶의 출발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 철학자 플라톤이 그리스 사람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철학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나는 너가 아니고 나여서 행복하다'라고 말한 것은 어쩐지 선善이니 정의니 이데아니 하는 무거운 플라톤 철학과 닮지 않은 야사野史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철학가의 행복론을 듣는 사람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고대 그리스 이래 2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인류는 땀 흘려 이룩한 과학문명의 변화에 비하면 인간의 내적 변화는 너무 미미하다.
지난여름 미국의 남부 해안 도시 뉴올리언스가 태풍으로 큰 재앙에 휩싸여 수천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고 그 피해가 9·11 사태를 능가한다고 지구촌이 술렁였다. 태풍 재해는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재앙에 대처하는 워싱턴 사람들의 몸놀림이 9·11 사태 때처럼 민첩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국의 양심이 세계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뉴올리언스가 흑인들의 도시가 아니고 백인들의 도시였다면 대처가 달랐을 것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빗발쳤다.
미국을 성토하는 세계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가슴도 겨냥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날 한국 땅에 살고 있는 50만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세계인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땅 델피의 신전 앞에 옴파로스를 세워놓듯 우리네 보통 사람도 배꼽이 속해 있는 자신의 몸을 신주처럼 떠받들고 그 안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한다.
영화 '가시나무 새'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환속한 가톨릭 파계 신부가 숨을 거두면서 연인에게 고백한다. "내 생애의 반은 하나님께, 반은 당신에게 바쳤으나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을 나 자신의 야망과 야심을 위해서 바쳤노라"고.
하느님에게도 연인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직자의 야심이란 뭐 대단한 구도의 길이 아니라 교계의 조직 안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구별심이었다. 비록 성직자라 하더라도 문학작품 속으로 들어오면 은밀한 곳에 숨겨진 내면을 송두리째 드러내기 마련이다. 성직자의 내심이 이럴진대 속인들이 남과 나를 구별하면서 보다 우위에 앉으려는 소망은 어떠할까. 자식을 위하고 부모을 위하고 배우자를 위한 간절한 기도조차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을 통한 세상의 성취가 자신의 선민적 바람을 간접으로 채워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승적이라고 느껴지는 플라톤의 행복론이 역사가 지어낸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가의 삶이 철학가의 사상과 일치한다면 얼마나 숨 막히겠는가. 플라톤의 철학 사상은 철학의 대상이지만, 인간 플라톤은 문학 쪽에서 바라보면 더 잘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경제특구라는 특별 지역이 있듯, 인간이 피조 때의 처음 모습을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에서 보려고 문학이라는 특구를 만들었다. 들어와 보니 인간 모습의 현현玄玄한 실루엣이 빛에 따라 이리저리 일렁인다. 여기선 신神도 인간에게 간섭하지 않으려 드니 홀로 미아迷兒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