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펫 / 배귀선

 

 

볕이 늘어져 있다. 제 주인인 내가 다가가도 반쯤 덮인 눈꺼풀 걷어낼 줄 모르고 마당에 모로 누워 꼬리만 스릉스릉 흔들어댄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오가는 꽃철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녀석을 보면 개 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 조각 볕도 아쉬운 소만小滿이기는 하지만 빈둥거리는 개를 탓해서 뭣하랴.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저 팔자소관이라는 말로 넘길 수밖에.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볼썽사납듯 요즘의 개들은 그 정도가 도를 넘은 것 같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개는 마당 한 귀퉁이나 마루 밑에서 주인이 들고나는 것을 보며 제 분수대로 살았다. 한밤중 무료해지면 달을 보고 짖거나, 겨울에는 송이송이 내리는 눈밭을 내달리면서 주인의 관심을 끌곤 했다. 하지만 요즘의 개는 반려라는 신분을 넘어 그 대접이 가히 제왕적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 풍경도 참으로 다양하다. 유행에 편승한 티브이의 동물 관련 프로그램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에 대한 깊은 사랑(?)을 끌어낸다. 그 결과 언제부터인가 너나 할 것 없이 개와 사람이 한 종족이 되어 엄마, 아빠, 오빠, 누나로 불린다. 심지어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는 견주를 표기할 때 개 이름을 앞세워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라는 자막을 띄우기도 한다.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하려는 자막의 수용이겠으나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는 아이들과 청소년의 정서를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빨리 와! 엄마, 그냥 간다."

길을 가다가 딴짓하는 강아지를 두고 이웃의 중년 여자가 하는 말이다. 서너 걸음 앞서 가면서도 개엄마(?)는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래도 강아지는 흙냄새가 새로운지 연신 킁킁거리며 신이 나 있다. 줄무늬 옷에 오드리 햅번이 로마의 휴일에서 썼던 모자와 비슷한 벙거지를 쓰고 질금질금 제 영역을 표시하며 가는 강아지를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몇 년 전 우리 집 지척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앞으로 논길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볕 좋은 날에는 사람들이 그 길에서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곤 한다. 아파트에 사는 한 젊은이도 해 질 녘이면 발음하기도 좀 까다로운 '개유모차'를 끌고 어김없이 나온다. 유모차 안에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주먹만 한 강아지가 로마의 황제처럼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제 주인을 종 부리듯 하며 산책을 즐긴다. 오줌을 누이려 내려놓으면 발에 흙이 묻을까 다리를 털며 유모차만 바라본다. 유모차의 옷, 몾자 등 얼추 잡아도 수십만 원은 들었음 직한 행차를 보면 사람이 주인인지 개가 주인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

가끔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개유모차 주인은 내가 아는 젊은이다. 어렸을 때 보고 십수 년이 흐른 지금 보아도 곱상하게 생긴 게 제 아버지를 빼닮았다. 젊은이의 아버지는 선배인데 몇 년 전 지병으로 죽었다. 그 후 선배의 부인은 타지에서 식당일을 하면서 틈틈이 박스를 주우며 살아간다. 가끔 자전거에 폐지를 싣고 가는 모습을 보기도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냥 스쳐 지나간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지고 마른 몸이지만 평소 자존심 많은 그녀가 아들의 개유모차 행차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함을 너머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요즘은 다섯 집 중 한 집꼴로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한다. 함께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소음과 악취 때문에 이웃과 다투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소식을 접하면 안타까움을 넘어 동물의 지위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개 전용 미용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개 전용 탄산수라든가 스파와 머드팩까지 소용되고, 심지어 개 유아원과 대신 산책 시켜주는 워킹서비스와 장례식장까지 등장하였으니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는 개도 한몫을 하는 듯하다. 나아가 개가 입은 옷을 세탁소에 맡기기까지 하는 세태이고 보면 가히 사람보다 나은, 개 팔자 상팔자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강아지의 옷이 수백 벌인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견주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물론 개와의 반려로 고독과 외로움을 삭일 수 있다. 또한 치매 환자 같은 경우에는 정서상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평생 부모에게 볼터치 한 번 안하는 사람이 개와 입맞춤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내 마음자리를 더듬어 보게 된다.

인공지능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간의 정서는 소멸해 갈 수밖에 없다. 과거,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나 헐거운 흙담은 이웃과의 정을 염두에 둔 열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소통의 정서는 시멘트 문화가 들어서면서 갇히게 되었다. 얼마 전 끼니 걱정 때문에 동반 음독자살을 한 세 모녀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첫새벽을 끌어 빈 박스 하나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의 모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듯싶다.

마당에 핀 봄 다 지도록 빈둥거리는 우리 집 개가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눈 치켜뜨고 쳐다본다. 발바리도 아니고 시쳇말로 똥개도 아닌, 종을 알 수 없는 저 녀석은 나와 함께 산지 어언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사람으로 치면 요단강을 눈앞에 둔 늙은이다. 그래도 낯선 사람이 오면 힘에 부친 짖음일지언정 짖어대며 주인에게 알린다. 목줄을 풀어주어도 다시 돌아와 마당에 앉는 녀석은 내가 외식하고 돌아오면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훤히 꿰뚫는다. 어쩌다 삼겹살에 소주잔을 걸치고 귀가한 날에는 혹시 고깃점이라도 남겨 오지 않았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요즘 뜨고 있는 홍삼이 함유된 지니펫은 아닐지라도 먹고 남긴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아낀다.

얼마 전 6년근 홍삼으로 만든 '정관장 지니펫'이라는 개 건강 식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인 나도 지금껏 먹어보지 못한 홍삼 제품을, 그것도 6년 근을 개가 먹는다고 하니 어쩐지 내 처지가 처량하기만 하다. 거기에 더하여 값이 비싸 망설여지는 유기농 제품까지 개를 위해 시판되고 있는 시절이고 보면, 먹고 입는 것에 관한 한 나는 분명 개 보다 못한 것 같다.

마당에서 뒹굴던 똥개가 갑자기 귀를 세우더니 벌떡 일어선다. 동구 쪽을 바라보며 목청껏 짓는다. 멀리, 개장수 확성기 소리가 가까워지는 한나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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