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모습

 

막스 피카르트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에는 그때까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 관찰 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오직 말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침묵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침묵은 발전되지 않는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터 나오는 것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현존한다. 침묵은 그 어느 먼 곳까지라도 뻗어가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우리 자신의 몸처럼 느낄 정도로 가까이 있다. 침묵은 잡을 수는 없지만 옷감마냥 직물마냥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멂과 가까움,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 있음 그리고 특수와 보편이 그처럼 한 통일체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현상에도 없다.

 

침묵은 오늘날 유일하게도 아무런 효용성도 없는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

 

다른 큰 현상들 모두가 효용의 세계에 병합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마저도 비행기들이 다니는 데에 소용이 되는 하나의 밝은 갱도 같은 것일 뿐이다. 물과 불 그 원소들도 효용의 세계에 흡수되었고 그리하여 그것들은 단지 이 효용의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침묵은 효용의 세계 외부에 위치한다. 침묵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침묵으로부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침묵은 비생산적이다. 그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모든 것들보다는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무목적적인 것이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의 곁에 있다. 그 무목적적인 것이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의 흐름을 중단시킨다. 그것은 사물들 속에 들어 있는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며 사물들이 이용당함으로써 입게 되는 손실을 줄여준다. 그것은 사물들을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현존재의 세계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사물들을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물들에게 성스러운 무효용성을 준다. 왜냐하면 침묵 자체가 무효용성, 성스러운 무효용성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껴야 한다.

순수한 법칙 속에서

신성하게 세워진 황무지를.

 

이 침묵 속에는 성스러운 황무지가 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황무지와 신이 세우신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법칙에 의해서 질서가 자리 잡는 움직임이란 없다. 침묵은 그 존재와 활동이 하나이다. 마치 한 별의 전체 궤도가 갑자기 하나의 빛으로 응축될 때처럼 침묵은 그 존재와 활동이 하나이다.

 

침묵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사물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떼어준다. 사물의 존재성은 침묵 속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발전 가능한 요소는 침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요컨대 이 존재성의 힘을 통해서 오직 존재만이 가지 있는 한 상태, 말하자면 신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사물들 속에 깃든 신적인 것의 자취는 침묵의 세계와 연관됨으로써 보존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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