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 백남일
봄이 오는 길목이라지만 아직은 날씨가 쌀쌀합니다. 그러나 집집의 대문짝엔 건양다경建陽多慶의 입춘서가 나붙고, 해토머리의 개구리도 기지개를 켜는지 제 뿌리가 사뭇 군시럽습니다.
오매불망 벼르던 봄나들이 채비를 서두릅니다. 속담에 “채비 사흘에 용천관龍川關 다 지나가겠다.”고 우려했지만 설레는 마음 추스를 길은 애오라지 이뿐이 아닌가 합니다.
연초록 뉴똥치마에 사붙이로 안팎 솔기 곱게 박은 깨끼저고리는 어떨는지요? 사뿐사뿐 발걸음 내디딜 때마다 태사신에 탄력이 붙을 것만 같습니다. 지난해 선들바람 타고 들녘을 지나 마을 안 돌각담 틈서리에 둥지를 틀게 된 동인은 순전히 바람의 배려였습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폐칩廢蟄의 계절은 시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 멈춤은 침체가 아닌 개화의 염원을 성사시키기 위한 힘의 배양이었습니다. 꽃대를 밀어 올려 봄을 만끽할 꿈의 궁전을 설계하는 정중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신약에도 고통은 인내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곧 희망을 잉태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희망의 끈으로 목숨을 이어가게 마련인가 봅니다.
부챗살 같은 햇살이 움츠린 잎사귀를 어루만집니다. 한데 뭇 행인의 발부리에 나약한 어린잎이 짓밟히기 일쑤랍니다. 그러나 원줄기 없이 뿌리줄기에서 거꿀바소꼴의 속잎을 무더기로 펼치기 때문에 저의 성장에는 별 지장이 없답니다. 어쩜, 봄을 탐하는 이들의 발싸심을 외면할 수 없어 부지런히 속살을 밀어냅니다. 그 결과 나의 뿌리는 발한이나 강장의 약재로 선호할 뿐만 아니라, 봄 타는 이의 입맛을 돋궈주는 봄나물로 각광을 받기도 한답니다.
단오절 단비에 부쩍부쩍 자라는 죽순처럼 이제 선망의 꽃대를 세워야겠습니다. 황금빛 보람을 떠받칠 월궁을 지탱하는 기둥처럼 말입니다. 그 위에 아련히 맴도는 황색 꽃부리 앉혀 수백의 꽃잎을 펼칩니다. 설레는 초야의 어둠을 깨는 터짐소리 아니, 한 우주가 열리는 희열의 순간입니다. 화관의 중심부위엔 큰애기 젖꽃판인 양 수줍은 노을빛이 매암돌 때 그 많은 꽃잎들을 촘촘히 펼칩니다. 국화과의 다년생 초본인 제 꽃잎의 모양이 사람의 혀를 닮았다 해서 혀꽃 또는 금잠초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황금빛 머금은 꽃송이가 수백의 혀뿌리를 엮어 성장했으니 말도 많겠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한 치 혀를 잘못 놀려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지만, 저는 오직 황색 묵언으로 이집 저집 문간 둘레에 봄소식만을 전할 뿐이랍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제 이름을 ‘문둘레’라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민들레란 명칭으로 정착됐다는 국립국어원의 부연설명이 저의 생태적 특성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늦부지런을 떠는 진달래가 만산을 붉게 물들일 때쯤이면, 저는 화무십일홍의 순리대로 금환을 내려놓고 하얀 면사포를 쓴답니다. 새색시 가마에 오르는 또 다른 삶의 신행 채비인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저는 두 번 꽃을 피우는 셈입니다. 처음은 해바라기를 닮은 황색 꽃을 가녀린 꽃대 위에 올려 만인에게 봄소식을 전하고, 두 번째는 씨앗을 갈무리한 갓털을 마치 설치미술을 연출하듯 별꽃으로 하얗게 치장한 뒤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답니다.
허공에서 내려다본 봄 동산이 초록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전한 봄소식에 삼천초목이 눈 비비며 깨어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제가 띄운 금빛 우표 한 장의 위력으로 봄 한나절이 질펀하게 무르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