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원 / 장미숙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계산대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바이트생과 어떤 남자가 쿠폰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남자는 빵값을 쿠폰으로 계산하려는데 실제 값하고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를 살펴보았다. 귀까지 꾹 눌러쓴 모자, 비쩍 마른 몸에 허름한 옷차림, 생각대로 S였다. 축 처진 어깨며 길고 여윈 손가락, 잠바 사이로 삐져나온 티셔츠 등이 그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의 변화는 알 수 없으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이제 사십 대 초반쯤 되었을 텐데 그에게서는 여전히 활기를 찾을 수 없었다. 초과금액이 나오자 그는 빵을 들었나 놓았다 하더니 할인 매대를 기웃거렸다.

카드를 꺼낼까, 마음이 들썩거렸다.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구차함을 보는 게 힘들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볼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처지가 나아졌다면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을 테니 묻기도 민망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쿠폰 가격에 정확히 맞췄는지 양쪽 주머니에 빵을 구겨 넣고 그는 매장을 나갔다. 아르바이트생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왜 저렇게 살까 하는 표정이었다. 젊은 남자가 돈 오백 원에 발발 떠는 게 정상으로 보일 리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인가. 그의 행동으로 봐서 좋아졌을 거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몇 년 전, 나와 일할 때 그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그를 채용한 점주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행동이 느리고 어눌했다. 보통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했기에 그의 출현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차림새마저 깔끔하지 못했다. 점주가 바뀌기 전이니 전 사장인 건물주가 가게를 운영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에게 일을 가르치면서 점주가 그를 쓰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자격증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공부에 매달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부모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아버지는 절에 가서 천 원짜리 밥을 사 먹고 남은 반찬을 가져오는 게 일과라 했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일할 수 없으며 여동생은 사회성이 부족해서 집에만 있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말은 나뭇잎 같이 바삭거렸다. 물기라고는 없는 건조한 일상을 남 얘기하듯 털어놓았다. 생기 없는 눈, 얼마나 삶이 지리멸렬하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싶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놓지 못하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노라 했다. 고구마를 몇 개 먹은 듯 속이 답답했다. 공부를 때려치우고 어디든 정식직원으로 취직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목에 걸렸으나 내뱉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어도 인생을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소극적인 삶에 길들어 있었다. 위로나 조언이 필요 없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루가 주어지면 절망을 떨치고 일어나지만, 그의 그늘은 햇빛 속에서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어둠에 갇혀 있으니 자신에 대한 애정인들 있을까. 결혼이야기를 꺼냈더니 피식 웃었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하도 공허해서 주위 공기마저 싸늘해졌다. ‘결혼 같은 것 생각한 적 없어요.’ 소중해야 할 자신의 삶을 그렇게 폐기 처분해 버렸다. 핏기없는 얼굴이 더 파리해 보여 왜? 라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쉰내가 사라지지 않았다. 여름에도 며칠째 세탁하지 않은 옷을 입었다. 목덜미는 땀으로 얼룩덜룩하고 옷소매는 가무잡잡했다. 손님이 눈치챌까 봐 불안할 지경이었다. 허기는 어쩔 수 없는지 남은 빵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빵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큰 가방을 가져왔다. 어느 날은 아들이 입지 않은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신발이 눈에 거슬린 날은 신발장을 뒤졌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운동화를 내밀었을 때 그는 비굴하리만치 고마워했다. 이미 받는 것에 익숙해진 몸짓에는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같은 것도 없었다.

어느 날, 점주가 말했다. S의 여동생에게 일을 시켜보기로 했단다. 아르바이트생 구하기도 힘든 데다 동정심이 점주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녀는 사회성이 부족해 보였다. 말을 더듬거렸고 사람 눈을 피했다. 시선을 깐 채 두 손을 비벼댔다. 며칠 뒤 조리실 한편에서 허겁지겁 빵을 먹는 그녀를 봤다. 한창 바쁜 시간인데 그런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누가 뺏기라도 할까 봐 먹기에 급급한 그녀의 모습에서 S의 좌절을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잘 가르쳐보라던 점주마저 고개를 흔들었다.

동생이 나간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도 그만두었다. 서비스업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그에게 오다가다 들르라고 말했더니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차피 팔고 남은 빵이라 누구에게 돌아가든 상관없었지만 그를 부러 챙겨준다는 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 번 오다 발길을 끊었다.

몇 달 뒤 도서관 근처에서 그를 보았다. 책을 반납하러 가는 중이라 했다. 직장에 다니느냐고 묻자 편의점에서 일한 지 두 달 되었단다. 결국은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수입에 의존하며 자신의 세계에 갇힌 상태였다. 그의 여동생을 길에서 두 번 마주쳤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쫓기듯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S의 절망 어린 눈빛이 겹쳤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난 앞에서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빈곤한 눈빛을 볼 때마다 비애가 등을 짓눌렀다. 돌파구가 없는 가정환경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의 첫 문장에 나오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는 말처럼 가난도 병마도 불행의 형태로 발아해서 싹을 틔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능력 없는 아버지, 아픈 어머니, 온전치 못한 동생이란 가족 구성원을 끌어안고 가기에 그의 영혼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집안이 불우하고 부모가 무능력하다고 모두 그처럼 바닥에 주저앉는 건 아니다. 오히려 불굴의 의지로 성공한 사람도 많은 세상이다. 모진 사람이라면 가족에게 등을 돌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끌어안으려 했다. 가족의 이름이라는 거창한 의미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추락하는 날개를 펼치고 끝까지 날아야 한다는 걸 자각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와 책임을 버리지 못해 희생을 선택한 사람들, 시간보다 오백 원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남겨진 희망은 무엇일까. 그의 몸에 달라붙은 온갖 궁색한 변명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낡은 천막처럼 남루한 오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에세이문학 - 에세이 광장 202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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