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바심 / 박순태
대숲에 꽃망울이 자글거린다. 60여 년간 푸르름을 지탱하고서야 핀다는 대꽃을 고모부 산소 앞에서 만났다. 대밭의 상서로운 기세가 조금 후 행해질 의식의 의미를 알리는 듯하다.
벼꽃 모양새의 꽃망울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이히 단산 봉황은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든다.”는‘경복궁타령’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꽃의 꽃말에 재회와 부활의 의미를 더하련다. 지아비를 여의고 반세기를 꼿꼿이 넘긴 고모님, 아흔일곱에 이생을 마무리한 주인공이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임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다. 방금이라도 봉황이 날아들 것만 같다.
흥부네 가족만큼이나 입이 많았던 우리 집이었다. 고모님은 육남 삼녀 중 위로 오빠 한 명을 두고 둘째로 태어났다. 땟거리 해결이 가장 큰 짐이었던 시대였다. 다랑논 몇 뙈기를 수확해봤자 겨울을 나기 전에 양식이 바닥나기 일쑤였다. 꾸어온 양의 절반을 이자로 갚아야 하는 장리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봄이 오면 산나물, 시락갱죽, 쑥털털이, 송기떡 등을 먹으며 모질고 모질었던 가난을 넘겼다. 허기로 전전긍긍하다가 급기야 야물지 않은 풋보리를 베어다 죽을 쑤어 간신히 보릿고개를 넘겼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절의 가정사를 구구절절 풀어내신 고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때 이르게 입에 들어온 게 풋보리 이삭밖에 없었으랴. 분을 채워 어른 주먹만큼 몸집을 불렸어야 제구실하는 감자도, 갓난아기 조막손 만큼에서 호미 끝에 걸려 흙 밖으로 나왔어야 했다. 개울가의 개복숭아도, 밭둑의 개똥참외도, 동네 어귀를 지키던 고목의 감도, 깊은 산속의 돌배도 남아나질 않았다. 하룻밤만 지나도 더 굵고 영글어갈 물알들이었다. 피돌기를 위해 피를 말리면서 베거나, 캐거나, 따곤 했다. 큰고모도 입 하나 덜기 위해 이팔청춘 열여섯이 되기 전에 족두리를 쓴 풋색시가 되었던 게다.
두 살 터울로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은 나이가 어려 머슴이나 식모살이를 엄두 내지 못했다. 그러했기에 고모님은 어린 나이에 박가네 성 하나를 가지고 궁핍하긴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씨 가문에 이름을 올렸다. 시절 인연이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대꽃의 화려한 개화는 이생을 하직하는 신호이다. 우르르 꽃 피워 열매 맺으면 대는 일제히 말라 죽는다. 대의 한살이는 싹틔워 성장하고 야물어져 잘려나가는 시점이 아니라, 뿌리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꽃피워 열매 맺기까지이다. 대꽃은 대의 일생을 마무리하는 자서전이자 다음 생을 예고하는 설계도이리라.
대는 나무가 아니다. 부름켜가 없어 죽순이 나온 그해에 성장을 마무리하고, 해를 거듭해 내실을 다져나가는 풀이다. 풀이 나무와 같은 삶을 영위하려니 고충이 얼마나 크랴. 한 해를 보내면서 몸집 성장은 마무리했다만 내면이 차지 않은 풋내기라서 제구실이 미진하다. 그래도 야물지 못한 몸체로 제 몫을 다하려 발버둥 친다. 그런가 하면 베어진 옆자리에 죽순을 내는 돌림 현상으로 뿌리가 노쇠하기까지 푸르름을 잇는다. 대숲이 사시장철 서걱거리며 술렁대야 하는 것도 운명 같은 풋바심이리라.
일복 하나는 타고나신 고모님이었다. 선비 집안의 혈을 이어받은 낭군을 지아비로 둔 탓에 들일까지 혼자 해결했어야 했다. 부지깽이도 한몫한다는 모내기 철에 고모부는 배 깔고 누워서 글만 읽으셨다. 그러했어도 고모님은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넘겼다. 할머니는 생전에“백면서생으로 살아가는 남편을 두고도 신세타령 없으니, 저 여편네는 천사다.”하면서 혀를 찼다.
고모님은 일곱 아들에 딸 하나를 뒀다. 자녀를 건사하느라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점점 얕아지는 쌀독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입이 늘어나는 출산을 축복으로 여긴 현모였다. 이러한 여인인들 친정 곳 하늘을 향해 쳐다볼 순간이 없다며 한탄하지 않았으랴. 하지만 남편을 탓하지 않은 채 천생연분으로 여겼다. 부부가 마음만 일치한다면 굳은 쇠도 끊을 수 있다는 주역의 말을 실천한 천도天道의 여인이었다. 자유도 생명도 주어진 여건 따라 힘쓴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고모님은 보드라우면서도 강인한 삶으로 보여주셨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손 귀한 집에 아들 일곱을 낳아 키워내신 고모님, 대가 끊어질 가문에 혈을 이은 풋바심이었다.
고모님은 외모는 물론 속성까지 할머니를 빼닮았다. 미모가 빼어났고, 얼굴은 항상 온화하고 밝았다. 여섯 아들을 둔 할머니보다 한 명을 더 생산하여 가문을 일구었다. 가정사를 물 흐르듯 처리하는 것도 그 어머니의 그 딸이었다.
막내가 첫돌을 지나고 고모부는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바닥을 칠 가세였지만 커가는 아들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사태가 위급하면 모두가 뭉치려는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법. 천심으로 인내한 고모님은 가정의 중심축이었다. 이 아들 저 아들의 말을 대꾸 없이 듣기만 했을 뿐, 이 입의 말을 저 귀에 옮기지도 않았다. 장남을 중심으로 가정사가 꾸려지도록 일머리를 트셨다. 혹시 맏아들의 생각이 이치에 맞지 않을 땐 살짝 불러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렇지만 여럿의 가지에서 일어나는 바람이 나무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고모네 집안을 보면서 알았다. 매사 큰 형님을 앞세워 여섯 동생이 합심했다. 일가친지의 경조사가 있을 때면 나란히 줄지어 참석하곤 했다. 명절날 칠남 일녀와 더불어 손자, 손녀, 증손까지 모이면 옹기굴 앞에 진열된 윤기 흐르는 항아리들을 보는 듯했다. 대청에 둘러앉아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장면은 고모님이 남긴 다복한 홈드라마였다. 유년에 할머니 손을 잡고 고모 댁을 들렀을 때, 부엌으로 불러 살짝 주걱 떡을 먹으라며 미소짓던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대꽃 훤箮’은 대 죽(竹)에 베풀 선(宣)이다. 고모부 산소 앞의 대꽃, 풋바심 여인의 한살이를 동질성의 대가 풀어낸 것일까. 고모님의 내생이 대꽃에서 아른거린다.